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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Nov 23. 2023

깨어진 것들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까지 19년 동안 깨어진 것들을 보며 그 안에서 자랐다. 형태를 잃고 부서진 것들은 다음 날이면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무수히 많이 깨진 유리들, 전화기, 한쪽 다리를 잃은 밥상, 어항. 움푹 파인 장롱은 버릴 수 없어서 그날의 공포를 강제적으로 되새기며 함께 지냈다. 마음먹고 생각하면 더 많은 것들을 나열할 수도 있다.


유일하게 깨지지 않은 게 있었는데 아버지가 아끼던 전축이었다. 가난한 우리 집에 4단짜리 전축이 있었다. 전축 옆 작은 진열장에는 다양한 LP와 노래 테이프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아버지는 온갖 물건은 다 부수어도 전축만큼은 절대 손대지 않았다. 반들거리는 검은색 전축은 엄마와 나보다 더 귀하게 여겨졌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전축이 꼴 보기 싫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파트로 이사 가며 아버지의 전축도 고물상에 버려졌다. 세월의 흔적에 따라 낡긴 했지만, 상처 하나 없이 아버지에게 사랑받았던 전축이 괜스레 못마땅했다. 전축을 고물상으로 보내기 위해 한쪽 구석에 빼놓았던 날, 나는 전축을 발로 걷어찼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반항이었다.


내게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카세트가 하나 있었다. 아버지의 전축에는 비할 수도 없을 만큼 초라했던, 2구짜리 은색 카세트. 그걸로 영어 듣기 평가를 연습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조용한 사춘기를 보냈다. 그 시절 내게 가장 필요했던 물건인 카세트는 아버지에 의해 깨지고 버려졌다.      


거실 바닥에 엎드려 영어 듣기 평가를 하던 어느 겨울밤이었다. 뜨끈한 바닥에 엎드려 영어를 듣고 있었던 것 자체가 문제였다. 졸음이 쏟아졌다. 잠깐만 자고 나와야지 하고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잠깐은 꽤 오랜 시간이 되었고, 잠결에 현관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아버지의 매서운 목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이게 뭐야! 집구석이 왜 이리 난장판이야!” 놀라서 방문을 열었을 때 아버지는 거실 한가운데 있는 카세트를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었다. 신발도 벗지 않은 아버지는 잔뜩 화가 난 상태로 문 앞에 서 계셨다. 나는 굳어진 발을 겨우 움직여 좁은 보폭으로 카세트를 향해 걸어갔다. 23평의 아파트 거실이 너무나 넓게 느껴졌다.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아버지는 카세트를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려진 카세트는 베란다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욕설과 함께 이미 부서진 카세트에 발길질이 가해졌다. 아버지는 밖에서 끌고 들어 온 화를 그렇게 쏟아 냈다. 아프고 무서웠다. 튀어나온 심장이 차가운 바닥에서 펄떡거리고 있는 듯했다. 나는 언제나처럼 벌벌 떨었다.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빌었다.


화풀이를 끝낸 아버지는 욕실로 들어가셨다.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처참히 부서진 카세트를 바라보았다. 카세트가 품고 있었던 테이프 두 개는 밖으로 튕겨 나와 있었다. 그중 하나는 김성재의 <너의 생일>이 녹음된 테이프였다. 필름을 길게 내뱉은 테이프는 부서진 카세트의 잔재들과 뒤엉켜 있었다.   


아버지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카세트와 테이프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엉킨 필름을 조심스레 풀어 살살 감아 봤지만 중간중간 접혀 있거나 끊어져 있었다. 재생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카세트에 넣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철커덕, 철커덕. 기계음만 외로이 울렸다.

    

그 테이프는 중학교 2학년 때 첫사랑에게 받은 생일 선물이었다. 소년은 공테이프에

<너의 생일>을 반복 녹음하여 내게 주었다. ‘수경이에게’라고 적혀있던 테이프는 소년 그 자체였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찰칵. 정지 버튼을 누르고 다시 처음부터 녹음하는 소년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디서도 살 수 없는, 세상의 하나뿐인 소중한 것. 나의 추억은, 나의 소년은 아버지 손에 깨지고 말았다. 벽에 기대어 앉아 부서진 카세트를 끌어안았다.

카세트 안에서 김성재의 목소리가,

소년의 마음이 구슬프게 흘러나오는 듯했다.


오늘 네 모습은 더 예쁘게 보여

오늘은 너만의 날이야

항상 나를 위해 같이 기뻐하고

또 같이 슬퍼해 주었던 너

아름다운 너의 그 모습 그대로

항상 머물러 주기를 바래

이 다음에 우리 어른이 되어도

우리의 꿈을 서로 간직하며

앞으로 열릴 수많은 날들에

너의 행복을 내가 기도할게

많은 선물보단 아주 작긴 해도

나의 이 마음 받아 주겠니

오늘을 맞이한 아름다운 너의 생일을 축하해

하나밖에 없는 아름다운 너의 생일을 축하해   


아득히 멀어지는 노래, 더는 듣지 못할 노래가 나를 떠나고 있었다. 아버지로 인해 많은 것들이 깨지고 버려질 때마다 내 꿈과 희망도 함께 부서져 갔다. 소년에 대한 마음도 조금씩 버리게 되었다. 나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소년은 내가 품을 수 없는 미래였다. 소년 앞에서 내 삶은 더욱 초라해질 뿐이었다.


소년이 청년이 되어 군에 입대했을 때, 나는 일방적으로 소년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소년은 끊어진 인연을 이으려 애썼지만, 더는 재생되지 않던 노래처럼 우리의 이야기도 그렇게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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