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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Jan 07. 2024

나를 돌보는 여정(1)

 2012년 11월 14일     

“수경 씨는 분노가 많은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기인한 공포와 노이로제 증상은 시간이 지나 분노로 나타나지요. 오랫동안 아버지에게 품었던 분노는 애석하게도 자신을 향해 표출됩니다.

수경 씨 안에 있는 분노의 크기가 거대해요. 그래서 언제라도 자기 자신을 놓아버릴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스스로를 파괴해 버릴 수 있는 사람이죠. 분노는 타인이나 다른 대상, 이를테면 불편한 상황, 사회적 현상 등에도 나타납니다.

수경 씨가 여자여서, 술을 많이 안 먹는 사람이어서 다행이에요. 남자의 경우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반사회적 행동이나 범죄 등 더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어요.

수경 씨의 이런 병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족이나 남편 역시 이해하기 어려워요. 상담 때마다 남편이 많이 이해해 준다고 말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남편은 그저 수경 씨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가 어려워요.

수경 씨는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에 태클이 걸리면 분노가 심해집니다. 참을 수 없죠. 어떻게든 자기 뜻대로 하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동을 하게되므로 자제해야 합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목적을 관철해야 합니다.

앞으로 도피하고 싶을 때는 제게 말하세요. 그럴 수 있도록 적당한 약을 처방해 줄 겁니다. 수경 씨는 일부러라도 도피해서 휴식을 취해주는 것이 필요해요. 일상이 불안에 찌들어 있습니다. 그저 안타깝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며 상담 기록을 메모장에 남겨두었다. 매번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오래된 메모장에서 내가 쓴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노가 많았던 나. 동의한다. 지인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순하고 착해 보이는 나에게 분노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일 테니.      


아버지의 폭력성과 엄마가 씌어놓은 착한아이 굴레는 내 마음을 병들게 했다. 참혹했던 폭력의 장면들은 고스란히 품어야했고, 아무도 살펴주지 않는 불안한 마음은 방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이는 부정적 감정들을 혼자 삼키고 참아내야 했다. 표출되지 못한 감정들은 시간이 지난다고 옅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히 뭉쳐 가슴에 박혀버렸다.      


결혼하며 부모님이 쳐 놓은 울타리를 벗어나게 되자, 오랜 기간 쌓인 감정의 퇴적물이 분노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의 기억으로 마음이 힘든 날은 허공에 대고 욕을 했다. 종이에 아버지 이름을 써 놓고 글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볼펜으로 난도질을 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분노는 남편에게도 이어졌다. 남편이 작은 것 하나라도 나를 거스르면 감당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댁과 나의 의견이 대립할 때 남편은 조율하려 애썼지만, 나에게 필요한 건 조율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수용과 지지였다. 남편이 조금이라도 내 편에 서지 않으면 버려진 기분이 들어 괴로웠다.

 ‘당신도 내 부모와 똑같아. 나를 지켜주지 않아.’      


그런 날에는 내 몸에 상처를 냈다. 용량을 초과하여 약을 먹고 깊은 잠에 빠져들기도 했다. 차라리 남편에게 화를 내거나 감정을 쏟아 내면 되는데 그럴 수 없었다. 분노 뒤에 숨어 있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남편이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내가 버림받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나는 나를 때렸다. 아버지가 화나면 엄마를 때렸듯이, 나도 화가 나면 나를 때리며 아프게 했다. 부모님께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은 그렇게 온몸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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