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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Jan 17. 2024

사라진 하루의 기억

 그날 나는 출근 중이었다. 2월의 첫 주였고, 몹시 추운 날이었다. 시내버스의 가장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꽁꽁 얼어붙은 논바닥, 생명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차디찬 공기, 초록을 잃은 메마른 풀들을 보며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저 애들이 다시 푸른빛을 띨 수 있을까.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나 같았다. 봄이 되면 따뜻한 공기가 대지를 데우며 싹을 틔우고, 다시 활기차게 될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인 양.

 버스의 훅한 히터 속에서도 나는 추웠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울다 보니 눈물이 더 많은 눈물을 끌어들였다.  


 학교에 도착했다. 온몸에 눈물을 휘감고 교실에 다다랐다. 아무도 없었다. 자리에 앉아 A4 용지를 꺼내 유서를 썼다. 처음 써 보는 유서는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다.     


-업무 때문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일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남겼던 마지막 말은 간결했다. 나로 인해 학교 관계자들이 의심받고 조사받지 않기를 바랐다. 죽으면서까지 누군가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유서를 접어 키보드 밑에 넣었다. 잠시 후 함께 교실을 사용하는 선생님이 출근하셨다. 선생님께는 몸이 아파 조퇴한다고 말하고 학교를 나왔다. 복무 결재도 없이 무단으로.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눈물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마지막 눈물임을 장담하며 원 없이 흘려보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별스럽지 않았다. 어차피 내게는 마지막 날이었으니까.     


 집에 도착했다. 집안의 모든 잠금장치를 걸어 잠갔다. 3중 잠금으로 된 현관문, 거실 베란다, 보일러실의 작은 창문까지 모두 잠갔다. 누구도 나를 구하러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고 좋아하던 원피스를 입었다. 남편 몰래 모아 두었던 약을 꺼내 모두 삼켰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서서히 잠들었다.


 거실 탁자에는 내가 남겨두었던, 허망한 문장만 남겨져 있었다. 인생을 마감하는데 이토록 짧은 문장이 전부라는 게 뒤늦게 허탈하게 다가왔다.    


-엄마 미안해요. 동생들아 미안해. 형준아 미안해. 나는 이제 좀 편안해지고 싶어.-    


 응급실에 실려 가 위세척을 하고 다음 날 저녁에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엄마를 보고 발악하는 바람에 안정제를 맞고 다시 잠들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눈을 떴을 때는 친한 동생의 얼굴이 보였다. 소라는 링거 바늘이 꽃혀 있는 가느다란 내 손목을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언니, 손목이 이게 뭐예요.


 나는 말라 있었다. 40kg을 겨우 넘긴 상태였다. 정신과 약 때문인지 신경 쇠약 때문인지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다. 소라가 돌아가고 어두운 병실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온몸이 서늘해지며 바들바들 떨려왔다. 내가 죽으려 했다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이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았고 무서웠다. 

 내게 아버지나 다름없었던 관장님이 보고 싶었다. 남편은 실례를 무릅쓰고 관장님께 연락했다. 눈 내리던 한밤중, 관장님께서 병원으로 오셨다. 불 꺼진 1층 로비에서 관장님을 만났다. 관장님을 뵙자 설움에 북받치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때 관장님과 나눴던 대화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바라보던 관장님의  눈빛은 여전히 내 마음에 담겨있다. '너는 훌륭한 사람이란다. 너는 언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단다. 나는 너를 믿는다.'

 스승님과 헤어지고 병실로 올라가 또다시 안정제를 맞았다. 그리고 다음 날 퇴원했다.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우리가 살던 아파트 302호 앞에 섰다. 선뜻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두꺼운 현관문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 구멍이 나를 살리기 위한 구멍이었구나.

 집주인에게 사과하고 주인이 원하는 가장 좋은 문으로 교체했다. 사과도 문을 교체하는 일도 모두 남편이 처리했다. 나는 남편 뒤에 숨었다. 숨어 있으면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다른 이들에게 나는 전보다 더욱 선명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내가 죽으려 했던 날, 아파트는 발칵 뒤집어졌다. 아침부터 소방차와 구급차, 경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단지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무수한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해 여름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내가 잠시 멈추었던 시간의 일은 남편과 동료들에게 들은 이야기로 다음과 같이 내 기억에 남게 되었다.

 유서를 쓰고 학교를 나왔을 때, 함께 교실을 사용하던 선생님은 청소를 하셨다. 그날따라 내 자리까지 정리하셨다. 걸레로 책상을 문지르다 키보드를 들어 올렸고, 키보드 밑에 접혀 있던 하얀 종이를 발견했다. 학생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가정통신문이라 생각하고 종이를 펼쳤다.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옆 반으로 달려갔다. 종이를 받아든 김 선생님은 유서임을 직감했다. 내가 정신과에 다니며 치료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무단으로 학교를 나가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확신했다. 김 선생님은 유서를 들고 급히 교장실로 갔다. 유서를 받아 든 교장 선생님은 떨리는 손으로 119에 전화했다.      


 나와 친했던 김 선생님과 류 선생님은 우리 집으로, 교장 선생님과 부장 선생님들은 내가 실려 가게 될 병원으로 향했다. 먼저 도착한 경찰관과 구급대원들은 3층으로 올라가 가장 빨리 집안으로 진입할 방안을 논의했다. 그 사이 남편과 김 선생님, 류 선생님이 도착했다. 남편과 류 선생님은 3층으로 올라갔고, 김 선생님은 차마 올라가지 못했다. 1층 공동현관 앞에 서서 울고만 있었다. 배 속의 태아를 감싸 안고 내가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오랫동안 김 선생님께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살았다. 김 선생님이 무사히 출산했을 때는 눈물 나도록 감사했고, 아이가 아플 때는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마음이 힘들기도 했다. 어느덧 김 선생님의 아이는 열두 살이 되었다. 엄마 배 속에서 많이 놀랐을 아이가 건강히 자라줘서 감사하다.     

 남들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다던 나는 결국 많은 이들에게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안겨 준 셈이다. 건강히 잘 사는 모습으로 그분들께 사과와 감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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