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경 Jan 11. 2024

나를 돌보는 여정(2)

 1주일 또는 2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상담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내가 진단받은 병명은 조울증, 강박장애, 불안장애였다. 치료 초반에는 우울증이라 진단받았는데, 8개월 정도 지났을 때 우울증에서 조울증으로 병명이 변경되었다.

 많게는 하루에 열 개의 알약을 먹었다. 다양한 병명에 따라 하루에 먹어야 하는 약의 종류도 많았다. 평소에 알약을 한꺼번에 삼키지 못해서 물과 함께 한 알씩 삼키다 보면 약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나에게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다. 병원에 가기 전까지 그것이 강박장애 유형의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깨어있는 동안 쉴 새 없이 머릿속으로 숫자를 셌다. 또각또각 채소를 썰며 하나, 둘, 셋….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며 하나, 둘, 셋, 넷…. 계단을 오르며 하나, 둘, 셋, 넷, 다섯…. 운전할 때는 도로의 자동차 번호판을 외우면서 다녔다. 숫자 세기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강박행동이라고 했다.           

 강박 증상의 여러 유형 중 오염에 대한 염려도 있었다. 정리 정돈을 잘하거나 주변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건 아니었지만 손을 자주 씻었다. 더욱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물의 청결에 극도로 예민했다. 설거지해 놓은 식기를 다시 씻어서 음식을 담았고, 식재료를 손질할 때는 씻고 또 씻었다. 요리하면서도 수시로 손을 씻었다. 그러다 보니 한 끼를 준비하는데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요리 한 번 하고 나면 기진맥진하여 소파에 쓰러지곤 했다.      


 강박행동은 몸이 피곤할 뿐 크게 불편하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문제는 강박사고였다. 불현듯 머리에 침투한 불행의 장면은 급속도로 나를 집어삼켰다. 형체 없는 공포에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히는 경험을 자주 했다. 그 공포는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결혼 전까지는 엄마가 죽을까 봐 걱정하며 살았다. 어린 시절 학교에 있는 동안 엄마가 나를 버리고 집을 떠나면 어쩌나, 죽어 버리면 어쩌나 걱정하느라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하교 후에 옷장을 열어 보며 엄마 옷가지들이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도 있었다.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1박 이상의 수학여행을 가거나 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면 내가 집에 없는 사이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초조했다. 불안이 극에 달할 때는 집에 몰래 전화해서 엄마 목소리를 확인하고 재빨리 끊어버리기도 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전화를 받아서 엄마가 받을 때까지 계속 전화했다가 아버지에게 호되게 욕을 먹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장난 전화하던 사람이 딸이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혼하자 그 대상이 남편에게로 옮겨갔다. 나는 남편이 죽을까 봐 매일매일 걱정했다. 남들은 쉽게 말한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고 좋은 생각만 해라, 운동하거나 취미생활을 하며 다른 것에 몰두해라. 하지만 비합리적 사고는 내 의지대로 조절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생각이 아니라 당장 일어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로 느껴졌다.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들의 죽을 것 같은 순간의 공포를 나는 알 것 같다.


 대부분의 강박적 사고는 혼자 있는 시간에 일어났다. 특히 남편이 퇴근하는 시간에 극대화되었다. 저녁 6시 30분에 집에 도착하는 남편이 5분이라도 늦으면 나는 무너졌다. 남편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과도한 생각은 나를 공포로 몰아갔다. 아무것도 못 하고 굳어져 거실 한복판에 서 있다가 문 여는 소리가 들리면 크게 안도하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펑펑 울었다. 그런 나를 보는 남편은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까.  

        

 의사 말에 따르면, 나는 힘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신체적 힘이 아닌 내면의 힘. 몸만 자랐지 아직 어린애였던 거다. 심지어 12세 미만의 아이들에게 보이는 분리불안증세가 서른인 내게 남아있다고 했다. 내 머릿속에는 ‘엄마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없어.’라는 비합리적인 공식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결혼하면서 공식이 수정되어 엄마의 자리에 남편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건 사랑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했다. 엄마든 남편이든 내가 그들을 끔찍이 사랑해서 그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라고 설명했다.          


 상담을 받고 오면 나도 몰랐던 나의 행동들이 이해되면서 후련하기도 했지만, 내가 한없이 작아지기도 했다. 나는 왜 이리 못났을까. 나는 왜 독립적이지 못할까. 나이 서른에 혼자 서는 게 두려워 남편을 붙잡고 있다니. 나 자신이 끔찍했다. 너무 싫고 미웠다. 무엇보다 남편에게 미안했다. 그럼에도 남편을 놓을 수 없었다. 남편 곁에 있고 싶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남편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병원에 가기 전까지는 나의 강박적 사고와 행동들이 그저 내가 겁 많은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여기며 살았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다 병이라고 하니 희망적이기도 했다. 불치병이 아닌 이상 치료하면 되니까. 약도 있다니까.      

 매일 약을 먹고 과거의 상처를 꺼내 치유하면서 강박증이 많이 호전되었다. 여전히 손을 자주 씻고, 오염에 대한 불안이 어느 정도 남아있지만, 더는 숫자를 세거나 강박적 사고에 발작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불안한 생각이 들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어제도 그제도 1년 전에도 2년 전에도 내가 생각하는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잖아. 오늘도 괜찮을 거야. 혹여 어떤 사고가 나더라도 그건 내가 걱정한다고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쩔 수 없이 일어난 현상일 뿐이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잘 대처할 수 있도록 더 단단해져야 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살펴 주기 위해 내 건강을 살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나는 이제 엄마로서 아내로서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일을 찾아 몸과 마음을 움직인다. 나의 강박과 불안이 아이에게 옮겨가지 않도록 느슨한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