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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Jan 01. 2024

사진 속 숨겨진 장면

90년대에 ‘이홍렬 쇼’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있었다. 지금의 유재석 만큼 개성 있는 외모와 재치 넘치는 입담을 자랑하던 개그맨 이홍렬 아저씨가 진행하던 토크쇼다. 어느 날 이홍렬 아저씨가 특별한 가족 행사를 소개했다. 결혼기념일 마다 가족사진을 찍는 다는 것. 공개한 사진 속에는 부부가 함께 나이 먹어 가는 모습,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참 예뻤다. 부러웠다. 나도 저런 가정에 소속되고 싶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가 결혼하게 된다면 이홍렬 아저씨처럼 결혼기념일 마다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내게는 열두 장의 결혼기념일 사진이 있다. 10대에 했던 다짐을 잊지 않고 결혼 후에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결혼기념일 사진 속 나의 가족은 남편과 나 둘이었다가 밤톨 같은 아이 한 명이 등장하며 셋이 되었다. 품에 안겨있던 자그마한 아이는 어느덧 내 어깨만큼 자라 있다. 책상 위에 붙여 놓고 매일 보는 사진임에도 여전히 감사하고 소중한 순간들이다. 결혼기념일마다 사진을 찍으며 이홍렬 아저씨를 떠올린다. 마음으로 감사함을 전한다.      


열두 장의 결혼기념일 사진 중 가장 기억에 남고 아릿한 건 1주년 사진이다. 사진 속의 우리는 환하게 웃고 있지만, 웃음 뒤에 울음이 가려져 있다. 우리만 볼 수 있는 숨겨진 장면이다. 나는 흰 가운을 입은 의사 앞에서 30년의 삶을 토해내며 울었고,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가슴으로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렸다.    

  

첫 번째 결혼기념일 사진을 찍던 날, 처음으로 정신건강의학과에 갔다. 낯선 곳, 병원, 그중에서도 정신건강의학과.

많이 긴장되었다. 남편 팔을 꽉 붙들고 대기실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며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공간을 살폈다. 은은한 아로마 향, 작게 울려 퍼지는 명상 음악, 벽에 붙어 있는 좋은 글귀들. 환자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자 만든 환경임에도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내 이름이 호명되고 남편과 함께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신상 파악을 하며 초진 차트를 작성했다. 이름, 나이, 가족관계 등. 그때까지만 해도 울지 않았다. 살짝 떨리는 음성이긴 했지만 또박또박 말할 수 있었다. 잠시 후, 과거의 이야기가 꺼내어지고 나는 처음 보는 의사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 아버지를 언급하며 분노에 찬 눈물을 흘렸고, 엄마를 떠올리며 죄책감과 원망 섞인 서러움의 눈물을 흘렸다. 우느라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다.     


남편이 가져다준 따뜻한 물을 마시며 마음을 추슬렀다. 의사의 권유에 따라 남편은 진료실을 나갔고, 나는 혼자 문장완성검사를 비롯한 여러 검사를 진행했다. 검사지에 무언가 쓰고 체크하면서도 계속 눈물을 닦았다. 테이블 위에 구겨진 티슈가 한가득 쌓여갈 때 즈음 그날의 검사가 끝이 났다.      


검사가 끝나고 의사는 말했다. 더 일찍 병원을 찾았으면 좋았겠다고.

30년 동안 아팠던 시간이 완전히 치유되려면 똑같이 30년이 걸린다며 안타까워했다. 나는 좌절하며 되물었다. 30년이요? 앞으로 30년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요? 의사는 태연하게 말했다. 30년은 최소한의 시간이라고.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말이었다. 허탈한 숨이 훅 튀어나왔다. 의사는 전문가와 약, 가족의 도움을 받아서 그 시간을 단축하자고 했다. 모든 병이 그렇듯 빨리 치료받는 게 가장 좋다며 지속적인 상담과 치료를 권유했다.


첫날 진단 받은 병명은 우울증이었고, 정확한 결과는 검사지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했다.      

다음 진료를 예약하고 수면제를 받아 병원을 나왔다. 불면과 불안의 시간을 30년 간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고 암울했다. 사진을 찍으러 가면서 계속 눈물을 닦아 냈다.    


그날 밤 처음으로 수면제를 먹고 일찍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꽤 오랜 시간 몽롱함을 느꼈다. 개운한 잠은 아니었지만 잠 들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일주일 뒤에 있을 진료 때까지 매일 밤 수면제를 먹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내 몸에 번져가는 작은 알약을 느끼면 신기하고도 섬뜩했다. 손톱만 한 백색의 알약 하나가 이토록 쉽게 사람을 잠재울 수 있다니.      

그때 나는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언젠가 내가 이 작은 알약들을 모아 한 번에 삼켜버리게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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