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경 Nov 10. 2023

안녕히 보내주기

내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하며 엄마와 자주 통화하고 있다. 한 편의 글이 나올 때마다 꼭 한 번씩은 전화해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한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생각과 감정은 다를지라도 모든 기억이 엄마와 일치했다. 엄마는 어떤 기억은 잊어버려 뜸을 들이곤 했는데 내가 그 상황을 설명하면 아 맞다, 그랬지, 하며 기억을 되살리셨다.

서로의 기억과 감정을 꺼내 울고 웃다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통화를 마무리할 때쯤 엄마는 말씀하신다.

인제 그만 잊으라고. 좋은 기억도 아닌데 왜 붙들고 사냐고.    

  

“엄마, 나도 잊고 싶은데 잊으려 하면 더 생생히 뇌리에 새겨지는 것 같아. 그래서 잊는 대신 보내주기로 했어. 기억을 꺼내고 정돈해서 종이에 담아내면 마음이 맑아져. 개운하고 후련해. 잘 살고 싶어서,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글을 쓰느라 처음 전화했을 때 엄마는 많이 걱정하셨다. 과거의 장면들을 묻는 딸이 혹여나 다시 아픈 건 아닌지. 또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고 있는 건지 불안해하셨다. 그러다 이제는 은근히 내 전화를 기다리시는 것 같다. 엄마에게 전화하면 생기 가득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신다. “딸, 뭐가 또 궁금하셔서 전화했어?”라며 대답할 준비를 하신다.      


지난주에는 수치스러운 기억을 꺼내 적다가 엄마에게 전화했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이었고 할머니와 왕래하지 않던 때였으니 고등학교 2학년 정도였겠다.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모르겠지만, 그날 나는 아버지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간절한 부탁이었다.   


엄마는 내가 중학생 때까지 하던 식당을 접고 아버지와 함께 슈퍼 일을 하고 계셨다. 작은 구멍가게가 여섯 식구를 먹여 살리던 때였다. 밥만 먹고 살아도 빠듯한 형편이었는데, 아버지는 가게 금고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금고에 만 원짜리가 몇 장 모이면 몰래 주머니 속에 넣었다. 아버지가 일주일 동안 모았던 돈은 매주 일요일 성당에서 할머니께 전해졌다.      


아버지의 효심은 정말이지 처절했다. 금고에서 꺼낸 돈을 엄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집 안 곳곳에 숨겨 두었는데 그 장소는 다양했다. 가장 어이없었던 곳은 성모마리아상 바닥이었다. 먼지를 닦으려고 거실 장에 올려져 있던 성모마리아 상을 들어 올렸는데, 거기에 접혀 있는 만 원짜리 한 장이 있었다. 그 외에도 장판 밑, 침대 매트 아래, 액자 뒤 등등 다양했다. 심지어 성경책 사이사이에도 돈이 끼워져 있었다.

주일마다 성당에 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버지는 기도를 위해 성당에 가는 걸까, 할머니께 돈을 드리기 위해 가는 걸까.     

 

신경이 날카로워진 엄마는 아버지를 감시하기 위해 낮잠도 안 주무시고 주변 가게로 마실도 가지 않은 채 눈에 불을 켜고 슈퍼를 지켰다. 금고에 만 원짜리가 쌓이지 않도록 만 원이 생기면 곧바로 가방에 넣어 아버지 눈에 보이지 않게 했다. 만 원짜리를 사수하기가 어려워진 아버지는 오천 원과 천 원짜리에도 손을 댔다.     

 

보이지 않는 혈투 속에서 엄마만큼이나 힘든 사람은 나였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하지 못한 말을 나에게 쏟아 내셨다. 나는 엄마의 하소연을 쉽게 넘기지 못하고, 엄마 감정에 메몰되어 함께 괴로워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 상황이 불안하기도 했다.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엄마는 곧 죽을 사람처럼 얼굴색이 까맣게 변해갔고, 나는 엄마가 잘못될까 봐 두려웠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가게에 갔을 때 아버지 혼자 가게를 보고 계셨다.  

    

“아빠, 엄마가 다 알고 계세요. 아빠가 금고에서 돈 꺼내다 할머니 갖다주는 거요. 이제 그만하시면 안 돼요? 우리가 잘사는 것도 아니고…. 이러다 엄마 병나겠어요.”    

 

말이 끝나고 침묵이 흘렀다. 가게는 순식간에 서늘한 공기로 가득 찼고, 고요한 정적 속에서 바라본 아버지의 표정은 섬뜩했다. 잠시 후 침묵을 깨는, 내 몸을 찢어 버릴 듯한 아버지의 음성이 내게 날아와 박혔다. 살면서 아직도 들어보지 못한 욕을 그때 아버지에게서 듣게 되었다.    

  

“이 좆같은 게!”     


그 한마디만으로도 나는 뒷걸음질 치며 비명을 질렀다. 얼굴을 감싸고 바들바들 떨었다. 가게 근처에 있던 엄마는 놀라서 뛰어 들어왔고 아버지의 겁박은 이어졌다.     


“내가 내 엄마한테 돈 준다는 데 너네가 무슨 상관이야. 한 번만 더 지껄이면 싹 다 불 질러 버릴 줄 알아!”   


그날 밤,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소리 없이 울었다. 한참을 울다 보니 소리 내지 못하고 우는 것도 지겹게 느껴졌다. 정말이지 내 삶이 너무도 지겨웠다. 울음을 멈추고 숨을 깊이 내쉬었다. 이불을 얼굴에 돌돌 말고 숨을 참았다. 불타 죽는 것보다 숨 막혀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이불을 풀었다. 헉헉 숨을 몰아쉬는데 안방에서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옆에서 등 돌려 자고 있을 엄마의 모습이 그려지자 멈춘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나는 내 방에서 숨죽여 울기라도 했지. 엄마는 아빠 곁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그 밤을 보냈을까.      


꺼내 놓지 않은 가혹했던 밤들이 아직도 내게는 남아 있다. 아팠던 밤들을 엄마와 함께 안녕히 보내주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홍원숙 할머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