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이라고 하면 으레 수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 서 있는 젊은 한 쌍이 떠오른다. 화려한 조명 아래, 앞으로 펼쳐질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자리. 그래서 결혼식은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순간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나 역시 그런 결혼식의 무게감이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어느 날, 종무소로 낯선 전화가 걸려 왔다. 구체적인 사연은 듣지 못했지만, 늦깎이 결혼식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젊은 시절 형편이 어려워 식을 올리지 못했는데, 이제라도 부처님 앞에서 조촐하게나마 혼례를 치르고 싶다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당시엔 늦깎이 결혼식에 대한 궁금증보다, 절에서도 결혼식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먼저 낯설게 다가왔다.
결혼식 당일, 나는 결혼식 준비를 위해 법당인 ‘무설전(無說殿)’으로 향했다. 혹시 방문할 하객들을 위해 좌복(방석)을 깔아놓으려고 했는데, “하나만 깔면 된다”는 주임님의 말에 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하객이 단 한 명이라니. 수많은 인파 속에서 축복받는 결혼식 풍경이 머릿속에서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오늘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가 법당 안으로 들어섰다. 눈대중으로 봐도 우리 부모님과 비슷한 연배의 노부부였다. 신부님의 몸에는 화려한 순백의 웨딩드레스 대신, 단정하고 기품 있는 검은색 정장이 입혀져 있었다. 신랑님 역시 말끔하게 다려 입은 턱시도가 아닌 정장 차림이었다. 두 분의 가슴에 달린 작은 코사지 꽃만이 오늘이 특별한 날임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하객석에는 지인으로 보이는 단 한 분만이 덩그러니 앉아 계셨다. 화려한 꽃장식도, 축가도 없는, 너무나도 조촐하고 낯선 풍경이었다.
결혼식은 고요하게 시작되었다. 요란한 팡파르나 “신랑 신부 입장!” 같은 힘찬 외침은 없었다. 대신, 화려한 샹들리에가 아닌 은은한 연등 불빛 아래, 석가모니 부처님이 온화한 미소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주례를 맡으신 남룡 스님께서 부처님께 삼배의 예를 올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혼인 서약을 이끄셨다.
나는 카메라 디스플레이 너머로 두 분의 모습을 조용히 담았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겠습니까?”라는 이 상투적인 주례사는 어울리지 않았다. 맞절을 위해 마주 선 두 분의 실루엣에서 새로운 시작의 설렘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수십 년을 함께 견뎌온 이들만이 나눌 수 있는 묵직한 안부 ‘고생했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침묵의 언어가 가득 차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서약서 위로 신부님의 손이 다가갔다. 팽팽하고 부드러운 손이 아니었다. 깊게 패인 주름과 굵어진 마디, 거칠어진 ‘진짜 손’이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이름을 꾹꾹 눌러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들에게 이 결혼식의 의미는 무엇일까? 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결혼식과 서약은 미래를 향한 불확실한 약속이 아닌 수십 년을 지지고 볶으며, 서로의 바닥까지 다 보면서도 끝내 손을 놓지 않았던 지난 세월에 대한 뜨거운 ‘증명’처럼 보였다. 면사포 한 번 씌워주지 못했던 남편의 평생 가슴 시린 미안함과, 그 미안함을 묵묵히 받아내며 곁을 지킨 아내의 단단한 사랑에 대한 깊은 고마움을 고백하는 자리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험난한 마라톤의 막바지에서, 여전히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서 있는 이들의 ‘완주’야말로 더 새로운 시작을 하는 커플보다 큰 박수를 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텅 빈 법당 안, 화려한 배경도, 축하해 주는 수많은 인파도 없었지만, 법당에서 인자하게 미소 짓는 하얀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이 예식의 특별한 하객이 되어주셨다. 나는 비록 기록을 위해 그 자리에 선 종무원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심을 다한 단 한 명의 하객이 되어 두 분의 남은 생이 평온한 축복으로 가득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