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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T 대신 108배를 하는 회사

월초가 되면 여느 회사처럼 이곳 전등사에서도 월간회의가 열린다. 하지만 회의실로 향하는 풍경은 사뭇 다르다. 남들은 회의실 들어갈 때 노트북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챙기지만, 우리는 좌복(방석)과 경전을 챙긴다. 우리 회사의 월간회의 안건 1번은 ‘대표님 훈화 말씀’이나 ‘실적 점검’이 아니라, ‘단체 얼차려’ 같은 108배이기 때문이다.

20240601_075530.jpg 매월 전등사 모든 직원이 무설전 법당에 모인다


죽비 소리가 울린다. 탁, 탁, 탁. 그 건조한 소리에 맞춰 수십 명의 직원들이 일제히 몸을 숙인다.


죽비 소리에 맞춰 엎드리며 생각한다. ‘하, 귀찮아. 오늘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인데…’ 수행자의 마음? 솔직히 1번부터 50번까지는 ‘이걸 왜 매달 해야 해?’라는 짜증이 지배한다. 나는 깨달음을 얻으러 온 게 아니라 월급 받으러 온 건데 말이다. 일하기도 벅찬데 기도와 마음 수행까지 요구하시는 스님을 보면, 너무 우리를 몰라주는 것 같아 답답하기도 했다.


절에는 ‘용상방(龍象榜)’이라는 것이 있다. *안거 때마다 수행자의 소임(역할)을 적어 붙이는 거대한 명단이다. 그 엄중한 명단에 우리 종무원들의 이름도 올라간다. 그것은 “당신은 단순한 직장인이 아니라, 이 도량을 지키는 용과 코끼리입니다”라는 무언의 압박이자 약속이다.


*안거 : 승려들이 여름(하안거)과 겨울(동안거)에 3개월씩 산문 밖 출입을 금하고, 오직 수행에만 전념하는 기간.

467421059_17947610546881777_6696037113428890459_n (1).jpg 자신의 소임을 적은 플래카드를 용상방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용’이나 ‘코끼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 입사할 때 품었던, “절에서 일하며 수행도 하고 나를 바꾸겠다”던 비장한 초심은 이미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무례한 관광객에게 속으로 욕을 하고, 동료의 실수에 짜증을 내고.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처럼, 어느 순간 나는 그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는 대로’ 하루하루를 때우고 있었다.


일반 회사에서도 매년 초가 되면 거창한 KPI나 핵심 가치를 벽에 붙여 놓는다. 하지만 그 구호들은 일상에 치이다 보면 금세 배경 소음이 되어버린다. 뇌로 외운 가치는 금방 휘발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절은 우리에게 ‘근육통’을 선물하는지도 모른다. 회사의 슬로건은 벽에 있지만, 절의 슬로건은 내 무릎과 허벅지에 새겨진다. 50배쯤 넘어가면 짜증 섞인 잡념은 사라지고, 오직 거친 숨소리와 땀방울만 남는다. 그제야 비로소 자각한다. ‘아, 나 절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이곳을 떠나 혼자 프리랜서가 되거나 내 사업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초심을 지킬 수 있을까? 회사나 절은 시스템으로, 혹은 이런 강제적인 108배로라도 나를 ‘리셋’시켜준다. 하지만 혼자가 되면, 나태해지고 본성대로 돌아가려는 나를 누가 무릎 꿇려 줄 수 있을까. 환경이 주는 강제성이 사라진 뒤에도, 나는 스스로 마음의 용상방을 쓸 수 있을까?


20240728_083714.jpg 복장도 어느덧 편안하게 입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귀찮았던 이 시간이 조금은 감사하게 느껴졌다. 108배는 나를 괴롭히는 시간이 아니라, 일상에 찌들어 ‘망가진 나’를 인정하고 다시 시작점으로 영점(Zero Point)을 맞추는 시간이었다.


죽비 소리가 멈추고 마지막 절을 올렸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고개를 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짜증 가득했던 회의실 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또 흔들릴 테지만, 다시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마음가짐을 기억하며 한 달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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