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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의 '넉넉한 낭비'


전등사 템플스테이관인 ‘월송요’ 앞마당에는 사람 키만 한 커다란 옹기 항아리들이 묵묵히 서 있다. 고즈넉한 한옥과 어우러진 풍경에, 사람들은 으레 “절이니까 당연히 직접 담근 된장이나 간장이 들어있겠지”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면 묘하게 투박한 이 항아리들의 정체는 사실 ‘술독’이다. 심지어 지금은 너무 낡아 무엇을 담기에도 힘든, 그야말로 ‘빈 껍데기’들이다.


이 항아리들은 전등사 동문 아래 있던 ‘금풍양조’라는 양조장에서 왔다. 오래전, 경영난으로 양조장이 문을 닫게 되었을 때였다. 공장을 정리하던 사장님은 갈 곳 잃은 거대한 항아리들을 처분해야 했다. 술 냄새가 배어 김장용으로도 쓸 수 없는, 일반 가정집에서는 두기조차 힘든 애물단지들이었다.


그때 전등사 회주 스님이 나섰다. “그 항아리들, 절로 올리세요. 제가 사겠습니다.”


20241008_145012.jpg 월송요 앞에 있는 항아리들


주변에서는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술을 금하는 수행 공간인 절에서, 그것도 쓸모도 없는 폐업한 양조장의 술독을 돈을 주고 사 오다니. 자본주의의 계산기로 두들겨 보면 명백한 ‘비합리적 소비’였다. 하지만 스님에게 그것은 물건 구매가 아니었다. 평생을 술 빚으며 살아온 이웃의 삶이 허무하게 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위로였고, 언젠가 이 투박한 그릇들이 귀하게 쓰일 날이 올 거라는 막연하지만 단단한 믿음이었다.


그 ‘쓸데없는 소비’의 진가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드러났다. 양조장 집 아드님이 가업을 잇겠다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던 양조장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전등사 마당에 묵묵히 서 있던 항아리들이 빛을 발했다. 100년 가까운 세월을 깨지지 않고 견뎌온 이 항아리들의 존재 덕분에, 금풍양조장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다. 비록 너무 낡아 다시 술을 담을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 항아리들은 절 마당에 여전히 서서 잊힐 뻔했던 지역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20250212_124123.jpg 금풍양조는 길상면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었다


전등사 경내를 걷다 보면 또 하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전등사 곳곳에 서 있는 ‘어린 왕자’ 조형물이다. 천년 고찰의 엄숙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 귀여운 동화 캐릭터를 보며 방문객들은 “재밌네” 하면서도 의아해한다.


이 역시 전등사의 ‘비합리적 소비’가 남긴 흔적이다. 전등사는 매년 ‘무설전’이라는 공간을 갤러리로 활용해 청년 작가들을 선정하고 전시회를 연다.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술을 계속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절은 전시 공간을 내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작품을 직접 구매하기도 한다.

당장 법당에 모실 불상도 아니고, 절의 분위기와 딱 들어맞는 탱화가 아니어도 괜찮다. 어린 왕자 조형물은 그렇게 절에 남았다. 누군가는 “절에 왜 어린 왕자가 있어?”라고 묻겠지만, 젊은 예술가들의 꿈을 응원하는 전등사의 조용한 표식이다.



20241004_171802.jpg 무설전에 전시된 그림을 설명하고 계신 작가님


20241004_163902.jpg 정족산사고지에서도 전시가 열리곤 한다


절에 살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자주 묻게 되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효율’이나 ‘합리성’이라는 것이 과연 절대적인 선(善)일까? 어쩌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시스템 유지를 위해 우리에게 심어준 좁은 규칙일지도 모른다. 돈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돈은 효율적으로 써야 하는 게 맞다. 100원을 쓰면 100원 이상의 가치가 돌아와야 하니까. 하지만 사람과 관계, 그리고 마음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주고, 누군가의 꿈을 지켜주는 일에 ‘가성비’를 따질 수 있을까?


‘저건 낭비야’, ‘왜 굳이 저런 비효율적인 일을 하지?’라며 옳고 그름을 분별했던 내 모습을 종종 발견하곤 했다. 확실히 절의 셈법은 세상의 계산기와 다르다. 때로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그 비합리적인 결정들이, 결국엔 전통을 지키고, 사람을 살리고, 문화를 꽃피운다


IMG_1400.JPG 전등사의 어린 왕자


생텍쥐페리의 소설 속 어린 왕자는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전등사의 낡은 술독과 생뚱맞은 어린 왕자는 세상의 속도와 셈법으로는 절대 지켜낼 수 없는 것들이, 이곳의 넉넉한 낭비 덕분에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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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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