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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온 Feb 24. 2023

150 / 40 월세 있읍니다.

작고 작은 독기들.


경제적 

지원이 또 끊겼다.




아빠에게 편입 합격의 소식을 알릴 때였다.



나     "아빠 저 xx대학교 호텔경영학과에 가기로 했어요."


아빠   "거기가 어디에 있는 학교냐?"


나      "..."




1년 2개월을 악착같이 살았던 시간을 허무하게 만든 아빠의 대답이었다. 아빠는 본인의 삶도 자수성가하며 살았던 삶인지라 내 자식이라면 당연히 해낼 줄 알아야 하는 것,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지며 살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냉정하고 서툰 표현으로 건네곤 했다.



아빠는 합격한 학교 리스트를 보고는 다른 대학교의 경영학과를 가라며 권유했다. 하지만 나는 아빠의 말보단 내가 선택한 대학교에 입학서를 제출했다. 


내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대학교는 합격한 5군데의 서울권 학교 중에 호텔경영학과로 유명한 학교였다. 고등학교 때 한 번쯤은 꿈꿔봤지만 그땐 성적이 못 되어 꿈꿀 수 없던 곳이었다. 영문학과를 다닐 때 얌전하고, 내향적인 문학적 배움은 외향적인 내 성격과 상당히 맞지 않는다는 걸 경험했기에 적극적인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마케팅과 경영, 활동적인 실무까지 배워 볼 수 있는 호텔경영학과가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화가 단단히 난 아빠는 '네 멋대로 살 거면 네 알아서 살아라.'라며 연락을 끊었다. 

그리곤 원래도 없었던 모든 경제적 지원을 일체 끊어버렸다.


자신이 정한 길로 안정적으로 딸이 살길 바랐지만 자신의 성격을 가장 많이 닮은 것도 알고 있었기에 그 고집을 꺾기 위한 아빠의 극단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보증금 

150 / 40




스무세 살, 

편입에 합격한 학교를 다니기 위해 학교 근처에 집을 찾았다.


경제적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거주할 집이 없었다. 그때 마침 대학교 근처에 작은 고시원이 하나 있었는데, 한 달에 28만 원 정도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네 달 정도를 지냈다.


지금은 법이 개정되어 고시원 한 방에 2평 이상에 창문이 달려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살던 고시원은 1평 조금 넘는 크기에 창문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방이 전부였다.


방에는 책상과 책상 안까지 자리를 차지한 작은 침대, 천장엔 행거, 침대 옆에 혼자서 서있을 만한 공간 정도 딱 그 정도였다. 평수라고 할 것도 없이 딱 그 정도의 아주 작고, 허름한 고시원이었다. 


그땐 또 어린 맘에 자존심이 있어 고시원에서 나갈 때마다 누군가와 마주칠까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대며 학교를 나서곤 했다. 눈치싸움이었다. 수험 생활에서 끝일 줄 알았던 고시원 생활이 어린 마음에 부끄럽고,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러다 하루는 학교 수업이 끝나고 걸어가는데, 전봇대에 손으로 쓰여 있는 한 전단지를 발견했다.




"150/40, 방 있읍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맞춤법도 틀린 문장이었다. 



'서울에 150에 40만 원이라니...' 



그 전단지를 보자마자 바로 집을 보러 갔다.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가 소유한 오래된 다가구 주택의 반지하의 방이었다. 한 6평 남짓 되는 공간이었고, 부엌과 방이 나뉘어 있었다. 가장 맘에 걸리는 건 방안에 화장실이었는데, 3단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변기에 앉으면 무릎이 벽에 붙을 정도의 길고, 비좁은 화장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냥, 그 반지하 집에서 살고 싶었다.



고시원에서 나설 때마다 하는 눈치싸움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엔 반지하가 무섭고, 허름하다고 생각도 못할 순수함이었고, 적어도 걸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게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나 돈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대학교 근처의 옷가게에서 옷을 판매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한 달에 50~60만 원 정도의 벌이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껴서 모아둔 돈 외에 나머지 40만 원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일찍이 이혼 가정이었던 나는 경제적으로 부족한 엄마에게 손을 벌리기가 어려웠다. 아빠 밑에서 자라진 않았지만 사업을 하며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아빠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입학과 동시에 4달 넘게 끊어온 연락을 한다는 건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따르릉)




아빠  "어."



4개월 만에 연락이 닿은 아빠의 첫 한마디는 역시나 무뚝뚝한 단답형 대답이었다.



     "아빠, 학교 근처에 저렴한 집이 나왔는데, 40만 원만 보내주세요."


아빠  "네 하고 싶은 대로 살 거면 네 알아서 살라고 하지 않았냐?"


     "딱 40만 원이 모자라서 그래요."


아빠  "지원 못해줘."


나    "이번만 도와주세요."



뚝.




절대로 도와주지 않을 것 같았던 아빠와의 통화가 끝나고, 통장엔 여분의 10만 원을 더한 50만 원이 들어왔다.  

그때 당시엔 그 40만 원이 없는 내가 어찌나 초라하게 느껴지던지. 학생인 내가 그게 당연한 나이였는데 말이다. 


뭐가 그리 서러웠을까. 강의실 옆 화장실에서 뭔가 모를 서러움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땐 몰랐지만 불과 몇 년 전에 알았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시기에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져 본인도 인생에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냈었다는 것을. 사업을 다시 일으키기 전, 아빠도 네 명의 자식들에 대한 책임감을 다하기 위해 트럭에 과일을 싣고 판매를 하는 일부터 폐지를 줍는 일도 하며 결국엔 사업을 일으켜 세웠다는 말을 듣고는 뭔가 모르게 아빠 본인의 삶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아빠가 나를 키우던 그 나이에 가까워지다 보니 


'이 나이는 여전히 젊은 나이이구나.'



어쩌면 아빠의 삶도, 나의 어린 날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았음을.



그때는 몰랐던 아빠의 냉정함은 내가 수많은 일을 해 볼 경험을 만들어 주었다. 

또, 뭐든 쉽게 얻어지는 건 없다는 걸 기본 세팅값으로 여기며 살게 해 주었다.


살면서 경제적인 이유가 아닌 말로 다 적지 못할 만큼 심한 힘든 상황이 있었을 때에도,



'나는 왜 이런 집에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만 할까.' 

'부모는 왜 나를 이렇게 도와주지 않는 걸까.' 



라며 그때의 상황과 부모를 원망하며 살아본 적은 없다. 



결국엔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다.'라며 자신감 있는 내가 있을 수 있었기에.

그때의 작고 작은 독기들이 지금의 단단한 나로 되어 있음이 좋다.



그 모든 어려움과 힘든 상황들은 '때문에'가 아닌 '덕분에'의 연속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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