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교회는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교사, 성가대, 청년부 임원, 세션, 피아노 반주 등등 여러 역할을 맡으며 열심히 활동했다. 스물여섯 살, 갑작스럽게 교회에서 나와야만 했다. 교회 목사님과 부모님 사이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부모님께서 평소 관심을 가지고 계시던 성남의 큰 교회로 옮기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하셨다. 부모님에게는 오랜 시간 계획해 오신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거의 20년 동안 쌓아온 나의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11월 첫 주일, 새로운 교회에 가게 되었다. 부모님은 행복한 얼굴로 새신자 등록을 하는데 나는 굳은 표정으로 옆에 앉아 있었다. 사진 찍을 때도 웃지 않았다.
청년부 예배는 주일 오후 두 시쯤 시작됐다. 본당 맨 뒷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데, 낯선 공간에서 낯선 이들끼리의 친숙한 모습을 보니 예전 교회가 더욱 그리웠다. (찬양 중에 마음이 바뀐 계기가 있었지만 간증문이 아니니 생략..)
새로운 교회에 점차 적응하기 시작했다. 새신자 과정으로 10주 양육을 받았는데, 교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친구가 양육자로 맺어졌다. 주일마다 만나며 조금씩 다른 친구들도 알아갔다.
교회 카페에 앉아 있는데 어떤 깡마른 남학생이 내 양육자에게 인사하며 장난을 걸었다. 별로 기분 좋아 보이는 장난은 아니어서 '쟤는 뭐지?' 싶었다.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 학생은 나에게도 같은 또래라며 인사를 건넸고, 한 달에 한 번 있는 또래 모임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또래장까지 맡고 있을 만큼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워낙 내성적이라 조용히 앉아만 있던 내게는,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이 꽤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 청년부 예배에서 또래별 찬양 축제를 한다고 했다. 서른 명 정도 되는 또래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우리는 세션 연주와 함께 찬양과 율동을 하기로 했다. 그 남학생은 드럼을 칠 줄 알았다. 다른 악기들도 하나씩 정해졌는데, 베이스 기타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베이스가 없네. 누구 베이스 할 줄 아는 사람 없어?"
이 교회에서는 조용히 지내고 싶었던 나였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아 잠시 망설이다 손을 들었다.
"나... 할 줄 아는데..."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드러머 남학생이"오 진짜? 잘됐다! 번호 좀 알려줘. 연습 시간 정해야 하니까." 하며 반가워했다. 번호를 건넸다.
문자가 왔고 문자를 보냈다. 문자가 자주 왔다. 답도 자주 보냈다.
5월부터는 천안에 파견 근무를 나가게 되었다. 장롱면허였기에 급히 운전 연수를 받고, 모닝을 구입했다. 열 번의 연수를 마치고 어쩔 수 없이 고속도로 운전을 바로 시작했다.
내려간 지 2주째 되던,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겨우 주차장에 도착했다. 늘 멀리까지 가서 공터에 주차를 해왔지만, 비가 너무 많이 왔기 때문에최대한 건물 가까이 대고 싶었다. 빈자리가 보였다. 좀 크게 돌아야 하는데 초보 운전자가 그걸 알 리 없었다.
왼쪽으로 돌다가 뒷좌석 문이 트럭에 끼어 버렸다.차를 조금씩 움직여 봐도 답이 안 나왔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 어????"
당황한 나머지 후진 기어를 넣은 채 차에서 내린 것이다. 차는 그대로 뒤로 움직여 주차된 SM520을 들이받았다. SM520의 앞 범퍼와 번호판이 찌그러졌다. 보험 처리를 하고 수리비를 물었는데, 펄 코팅(?) 차량이라 비용이 꽤 많이 나왔던 기억이 난다.
결국 비는 비대로 다 맞고, 내 차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문이 찌그러지고 왼쪽 사이드 미러는 날아갔으며 뒷 범퍼가 찢어졌다. 새 차 뽑은 지 한 달도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퇴근하면서 차를 맡기려는데, 운전 중 바퀴가 자꾸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초보 운전자가 사이드 미러 없이 운전하기...ㅋㅋ) 내려서 확인해 보니, 범퍼가 내려앉아 바퀴에 닿고 있었다. 견인차를 불러 공업사로 보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고, 원룸에 인터넷 설치도 안 해놔서 다음 날 출근할 방법 찾기가 막막했다. 그때 드러머 친구에게 연락이 왔고, 하소연을 했다. 그는 콜택시 번호를 검색해 알려주었다. 오래 통화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는 더 자주 연락하게 되었다.
이쯤 되니 그 친구가 나에게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려운 시간을 같이 보내줘서 그런 건지, 나도 조금씩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션 연습을 위해 주고받았던 연락처였지만, 사적인 대화가 더 많았다. 어느 날 그가 올림픽공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 도시락을 사서 공원에서 같이 산책하고 잔디밭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그날 저녁, 그 친구는 나에게 고백했다. 베이시스트와 드러머의 은밀한 만남은 D+1로 바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양육자 친구에게 전했을 때, 친구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웃고는 있었지만 '왜? 왜지? 괜찮을까?'라고 말하는 얼굴이었다. 축제 찬양은 잘 마쳤고, 이후 유년부 찬양팀에서 함께 봉사했다. 역시나 찬양팀은 교회 적응의 최단 루트인 게 틀림없다. 여러 교육 과정에 참여하고 단기선교 팀장을 맡는 등 나는 교회에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2012년 3월, 1년 10개월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돌아보면 우리는 만나게 되어있던 운명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교회를 옮기게 된 것, 그 해에 유일하게 또래별로 찬양 축제가 열렸던 것, 또래에 베이시스트가 없었던 것, 내게 일어난 사고가 우리를 가까워지게 만든 것까지, 하나같이 연결되는 인연처럼 느껴진다.
내가 베이스를 할 줄 알았기에 맺어진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베이스가 맺어준 가장 신기하고 소중한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