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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AGE Oct 16. 2024

캐나다에서도 나는 베이시스트였다

어학연수 기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악기



대학 1학년 때, 영어회화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며 동기 몇 명과 함께 강남 파고다 어학원에 찾아갔다. 레벨 테스트를 받았다. 6년 공교육과 사교육, 심지어 수능 외국어영역 1등급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원어민의 질문에 기본적인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부끄러웠다. 그렇게 나는 가장 기초반에 들어갔고, 그 반에서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학원 공부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2학년을 마치고 전공에 대해 회의감이 생겨 휴학하고 싶었다. 겸사겸사 어학연수를 다녀와야겠다 싶어 계획을 세웠다.


어학연수지는 캐나다 밴쿠버로 정했다. 한국인이 많다고 하지만, 이왕이면 날씨도 좋고  좋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과외로 모은 돈과 장학금 받은 것을 열심히 모았지만, 비행기표와 한두 달 지낼 비용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부모님은 생활비와 학원비를 꼬박꼬박 보내 주셨다.


첫 홈스테이와 그 집 꼬마아이. 왜 스무살인 나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거니..ㅠ


스물한 살. 나는 무슨 자신감으로 혼자 지구 반대편으로 갈 생각을 했던 걸까. 부모님은 무슨 믿음으로 딸을 홀로 비행기에 태워 보내셨던 걸까. 지금 돌이켜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전화와 문자만 되는 핸드폰에 의지해야 하는 때였는데 말이다. 국제 전화 카드를 구입해서 카드 번호를 누르고 구입한 시간만큼 통화할 수 있는 시대였다.


가기 전까지는 기대감으로 들떴지만, 공항에서 출국 심사대로 들어가며 울음을 터뜨렸다. 현실이 되니 부모님과 헤어져야 해서 슬펐고,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다행히 잘 도착하고 홈스테이 호스트의 픽업을 받아 어학연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국어는 하지 말고 영어만 해야지. 이 돈이 다 얼만데, 내가 영어를 마스터하고야 만다!'는 결심으로 갔다.

외국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 많은 듣기와 공부가 필요하지만, 일단 회화를 늘리기 위해서는 말을 많이 해야 한다. 그러니 어학은 극 내향인인 나에게는 또 하나의 큰 산이었다.


나는 원체 말이 없는 사람이다. 별로 하고 싶은 말도 없다. 그런 내가 현지에 있다고 토커티브 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아무 외국인에게 말 걸고 이어 나갈 만한 배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외국에 나가서야 깨달았다. 사실 나에게 회화 공부는 한국이든 외국이든 크게 상관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자들이 입대하고 처음 교회에 가면 자리에 앉기만 해도 눈물 콧물 다 쏟는다는 마음을 나는 반쯤은 이해한다. 도착 후 첫 주일, 밴쿠버에 한인교회에 들어서자마자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처음 온 사람 소개하느라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외국 생활에서 내 마음의 안식처는 한인교회였다. 주일에 예배만 드리다가, 또래 모임에 한두 번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한인교회는 꽤 컸고, 한국 유학생들이 많아 열정이 넘쳤다.


같은 또래에 찬양팀에서 베이스를 치던 친구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 악기 얘기가 나왔고, 내가 밴드에서 베이스를 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본인은 다른 사역을 해야 해서 안 그래도 고민이었다며, 악기는 교회에 있으니 나보고 베이스를 쳐달라고 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교회에서 가끔 땜빵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새로운 교회에서의 소그룹, 특히 찬양팀은 적응의 최단 루트이다. 베이시스트는 귀했다. 더군다나 여자 베이시스트 아닌가. 목사님이 신기하셨는지 설교 중에 나를 두세 번 언급하시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한인교회에 완전 인볼브가 되었다.


교회에서 몇 년 만에 크리스마스 뮤지컬 공연을 한다고 했다. 공연장을 빌려 이틀 동안 세 번의 공연을 하는, 제대로 된 뮤지컬이었다. 여기에 출연자로 섭외까지 되었다. 연습하기 위해 모이고 모이고 또 모였다. 내 영어 공부는 안드로메다로 가 버렸다.


영어는 물론 많이 늘어서 돌아왔다. 자신감과 추억이 더 많이 늘어서 돌아왔다는 것이 흠인지 흥(興)인지 모르겠다. 한국에 돌아와 다시 영어 회화반에 들어가기 위해 테스트를 받았고, 단계가 많이 올라가 있었다. 영어는 안 쓰면 쉽게 잊어버린다. 영어 말고 이러한 추억이 없었다면, 밴쿠버에서의 1년의 이렇게 특별하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베이스기타 덕분이었다. 내가 베이스를 연주할 줄 몰랐다면, 교회에 마음의 평안을 얻으러만 다녔을 것이고, 평범한 1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영어를 다 잊어버린 지금 내가 뭘 하고 왔던가 후회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캐나다로 가기 전 가을에 은퇴 공연을 했던 베이스를 바다 건너 외국에서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특별한 경험은 때때로 우리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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