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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AGE Oct 23. 2024

그랑블루

마지막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한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날 한국에서 국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함께 밴드에서 기타를 쳤던 친구였다. 캐나다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간식과 물품들을 택배로 보내주기도 했었다. 뻥튀기가 생각난다고 하니 커다란 박스에 동그란 뻥튀기 한 봉지까지 함께 담아 보내주었다.

곧 돌아간다는 내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연락을 해왔다.


"너 오면 같이 공연 한번 하자."


모두 흩어졌는데, 무슨 공연이냐고 되물었다. 우리 밴드가 결성된 지 몇 달 후, 학과에 또 하나의 밴드가 더 만들어졌었다. 당시 우리 학번은 A, B, C반 3개로 나뉘어 있었고, 우리 밴드는 통합 밴드였다. A반에서 '알케미스트'라는 밴드가 새로 창단됐었는데, 그 멤버 일부와 같이 하자는 이야기였다.


학교에 남아 있던 친구들은 곧 4학년이 된다. 마지막으로 공연을 너무 하고 싶다는 마음에 팀을 꾸렸고, 거기에 나를 부른 것이다.




밴드 은퇴 무대가 끝나고, 어학연수를 가면서 내 베이스 기타는 교회에 기증하다시피 했다. 가끔 교회에서도 연주하기도 했고, 고등학생 제자에게 가르쳐 주기도 했었기에 교회에 보관해 두었다. 당연히 개인적으로 다시 쓸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두근두근했다. 처음 밴드를 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 집에 가던 지하철에서 느꼈던 그 기분이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준비할 시간이 짧았지만, 마음은 이미 설렘으로 가득했다.


새해가 지나고 1월, 추운 날씨의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두 달 정도 연습할 시간이 있었지만, 연습보다 중요한 것은 다이어트였다.

부모님께 생활비를 받던 학생이 뭘 그리 많이 잘 먹었는지, 몸무게가 8킬로나 불어서 돌아왔다. 지내는 동안 솔직히 그렇게 살이 많이 쪘는지 몰랐다. 조금씩 늘어갔으니.... 내가 엄청 통통해져서 돌아와 놀랐더라는 말씀을 엄마가 뒤늦게 하셨다. (충격받을까 봐 당시에 대놓고 말씀은 안 하셨나 보다.) 예전 사진과 밴쿠버에서 찍은 사진을 비교해 보니 알게 되었다.


불어난 살을 두 달 동안 빼야 했다. 동시에 공연할 곡을 연습하고 외워야 했다. 그렇게 복학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3학년이 시작되었고, 아직은 추운 봄날 나의 진짜 마지막 무대를 서게 되었다.


그랑블루


팀 이름과 곡 선정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차분한 곡들과 팀명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한참 지나서야 그랑블루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음악에 더 깊이 빠져보자, 사랑보다 음악이다 이런 뜻으로 지었던 이름이 아니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전공에 회의가 들어 휴학했던 것이었지만, 다시 돌아와 복학하고 전공을 마치고 취업했다. 다른 친구들도 졸업 후 흩어졌다.

연락을 주고받을 일이 딱히 없었다. 미니홈피로 근근이 연락을 이어갔다. 미니홈피가 사라지면서 우리의 연결도 희미해졌다. 뒤늦게 군대에 가거나 진로를 정하며 방황하던 친구들 이야기도 들려왔다. 남자 보컬 친구는 어쩌다 군대를 두 번 갔고, 티몬의 초창기 멤버로 일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얼마 전,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여전히 사업 전선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름이 특이해서 검색하니 나온다.) 얼굴이 그대로였다. 기타 치던 친구는 회사 다니다가 음악 하려고 나왔고, 최근에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전해 들었다. (이 친구는 이름이 너무너무 평범해서 SNS로 소식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한때는 영원할 것 같았던 우리들의 시간이 이제는 각자의 점으로 남아버린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그러한 점들이 계속 모여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일 테지. 모든 점들이 소중하다. 그랑블루처럼, 다른 것보다 음악이 우선했던 추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20년이 지난 지금, 각자의 길에서 소중한 기억으로 떠올리며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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