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4] 이혼하러 갑니다

부정-분노-공포-흥정-[수용]

by 나저씨


시간이 지나면서, 분노도하고, 흥정도 해보지만, 마지막엔 결국 현타가 심하게 왔다. 그래서,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이건 또 무슨 지지리 궁상이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결혼생활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것이다. 이렇듯 내 삶에 대해 직시하게 되면서, 조금씩 이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도 정리되고, 감정에 휘둘려서 아무것도 못하던 시간보다 이성에 의한 사고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혼은 그 누구보다 나를 위한 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이혼 이후에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계획을 고민하고, 이혼 준비로 나의 정신적인 부분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인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혼하고 싶지 않은 생각은 여전히 내 안에서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튀어나오고, 난 그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이성적으로 나 스스로를 달래고 설득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이야기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혼 후에도 지금처럼 폐인처럼 지낼래? 이혼하고 나서, 상대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내가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야!

라고 말이다. 하지만, 막상 무언가를 하려면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아니, 결혼 이후에는 가족의 안정과 행복이 내 삶의 우선순위 첫 번째였다. 그렇기에, 나의 모든 결정과 생활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데 집중해 있었고, 현실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외국 유학 준비와 현지 유학 지원을 위한 삶을 살았다. 한국에서 쓰는 돈을 최대한 아껴서 아내에게 보내면서, 나 스스로 대견해했다. 남편으로서 정말 멋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면서 말이다.




나의 이런 멍청하리만큼 순진한 생각과 믿음 때문에, 아내는 현지에서 자기의 공부만 전념하면서 살아도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아도) 부족함 없이 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녀의 부모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바보 같지만, 그때는 그게 도리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나는 한국에서 조그마한 방에서 혼자 살면서, 최대한 돈을 아껴서 아내에게 돈을 보냈다. 그렇게 아내가 유학을 준비하고 유학을 간 시간을 전부 합치면 약 6년 정도가 되었고, 그때 쓴 돈은 지방에서 브랜드 아파트 하나 정도는 현금으로 구매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썼다. 결혼 생활의 6년의 시간 동안 내 삶의 중심은 아내의 꿈을 이뤄주기 위한 노력을 하는 생활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혼을 앞둔 지금 상황에서, 내 삶의 구심점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내가 아이라도 있다면, 아이에게 집중을 하겠지만 아이도 없는 상황에서 난 완전히 길 잃은 아이와 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이런 상황이 화가 나고 억울해서, 부정도 하고, 분노도 하면서 흥정도 해보았지만, 결국에는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정말 이혼은


답이 이미 정해진 사용자 이용동의서의 예/아니오 질문과 같은 것

이라는 걸 말이다.




수용의 상태가 지난 후엔, 삶이 조금 나아질까 싶었는데, 더 다이내믹하게 힘들어졌다. 예전엔 한 가지 감정만 집중하면 충분했는데, 이제는 5가지의 감정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서 멘탈이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혼이 생각나서, 화를 내다가 다시 한번 잘해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아침에 혼자 눈뜨는 삶이 평생 가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쌓인다. 그러다, 다시 평온함을 찾아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5가지의 감정이 지속되는 시간은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르지만, 평소에는 1시간 안에 정리가 되곤 한다. 그리고, 이런 감정의 변화가 하루에 보통 2~3번 나타난다. 아침에 눈떠서, 퇴근하다가, 그리고 잠 잘려 누웠을 때... 정말 잠을 자기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고, 이로 인해 불면증을 겪기도 했고, 지금도 불면증으로 하루에 4시간을 자면 성공했다 생각할 정도로 잠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수용의 단계를 지나고 나니, 이젠 내가 나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노하우가 생겨났다. 그래서, 나의 감정 롤러코스터에 핸들과 브레이크를 갖게 된 느낌이다. 무섭지만, 큰 사고는 터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혼이라는 불행을 대면하는 나의 롤러코스터와 같은 감정 변화는 천천히 나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