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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노 Oct 24. 2024

책의 풍경들

읽다

  사랑을 시작할 때, 오케스트라의 현악기 합주를 들을 때, 여행을 계획하고 아름다운 숙소에 들어섰을 때, 거대한 자연을 마주했을 때, 화음을 넣어 누군가와 함께 노래 부를 때,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과 내가 교감했을 때... 내 심장은 두근거린다.


 또 설레는 것 중 하나는 책이 있는 모든 풍경이다.

 휴일 이른 아침, 아늑한 가구와 조명으로 모던하게 디자인된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 편안하고 그 풍경이 아름답다. 없는 책이 없는 대형서점에서 예술분야의 컬러풀한 화보집이 켜켜이 쌓여 있는 풍경은 보기만 해도 흐뭇한 건 왜일까.

 독립서점의 정성 들여 분류된 테마별 책들 사이를 걸으며 내가 읽을 책을 고른 후,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도 아름답다. 국제 도서전에 전시된 세계 여러 나라의 어린이 그림책은 언어를 알지 못해도 전달되는 메시지에 발걸음을 멈추고 그림에 빠져든다. 속초의 울산바위가 보이는 설악산책 도서관 한 켠에는 귀한 데이비드 호크니의 대형 도록이 놓여 있어 한참을 서서 넘겨 보았다. 여행지에 가져간 책이 하얀 침대 시트 위에 놓이는 순간과 도서관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희망 도서를 받고 펼쳐보는 순간. 책을 선물로 건네는 순간. 나와 책의 모든 순간들.

 책이 있는 모든 풍경이 나의 감정을 좋음 상태로 가져다준다.



 이런 나의 반응은 아마도 책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 준 경험들이 쌓여 뇌의 한 부분에 새겨져 있어 나오는 것 같다.

 책 한 권은 작고 가볍지만 그 안의 내용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 

 누군가는 <타인이라는 외국>이라는 표현으로 한 사람이 우주고, 그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며 알게 된다는 것은 마치 외국을 여행하는 것처럼 새로운 세계를 마주 대하는 일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나는 <책 한 권이라는 외국>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아, 내가 외국여행을 좋아하니 책을 안 좋아할 수가 없나 보다.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듯 한 권 한 권의 책을 읽는다. 그래서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걸으면서 하는 독서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대화가 즐거운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책을 만나서 작가의 생각을 듣는다. 읽기가 듣기가 되는 순간이다. 아무와 만나지 않아도 온 세상을 겪은 것처럼 아프고 두렵고 신나고 짜릿하다가 슬퍼 죽을 것 같다. 이 세상의 수많은 마음들과 만난다.

 그런데, 그 책들은 내가 모르는 놀라운 진실을 알려준다. 내가 표현하지 못하는 놀라운 언어를 알려준다. 인간의 다양한 삶의 경험과 방식을 알려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놀라움의 연속에서 느끼는 그 쾌락 때문에 책 읽기가 계속된다.


 책을 읽다 보면 두고두고 반복해서 정독해야 할 책, 읽다가 멈춰야 할 책, 가볍게 읽어야 할 책, 그림만 보고 넘길 책 등 기준이 생긴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깊이 새겨지는 책이나 이야기가 흥미진진 해지는 책을 만나면 그 책을 읽을 동안 행복이 보장된다. 예전에는 그런 책을 만나면 아껴 읽었지만 세상에 그런 책이 산더미같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제는 시간이 부족하다. 책이 주는 짜릿함이 지속되고 인생의 잉여 시간들이 행복으로 채워진다.  


 인간은 뇌에 각인된 과거의 경험들로 끊임없이 재창조해서 살아간다. 기억이나 경험들이 빈약하면 이전에 가본 곳, 해본 것 말고는 앞으로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할지 상상할 수가 없다. 시공을 초월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책 읽기로 쌓인 간접경험들이 나의 경험들과 정교하게 결합되어 삶의 질이 한 차원 높아진다.

 장자의 말처럼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여름 한철 매미가 다른 계절의 풍경을 알 도리가 없다.

 읽기를 통하여 음악과 미술등 예술의 세계를 알게 되어 즐거움의 범위가 넓어지고, 역사를 알게 되어 울분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도리를 알게 되고, 타인의 마음과 표정을 읽고 이해하는 폭이 분명히 점점 넓어진다.


 그리고 많은 책들은 말한다. 인간은 감각기관(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받아들여진 세계에 대한 모든 정보를 뇌에서 자기 기준으로 해석하며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은 없고 나의 관점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라는 유연한 사고를 해야 한다고.


 읽기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꽃과 새와 물고기의 색깔들, 그 색의 조합들, 매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하늘의 느낌들, 봄의 연두 잎들, 길가에 떨어진 꽃잎들, 낙엽들, 사물 하나하나에 깃든 아름다움들, 미추를 떠나 그 자체로 아름다운 얼굴들.

 책을 읽고 세상을 읽는 힘을 얻는다.

 여전히 나는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세상의 수많은 다독가들에 비하면 책 좀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우물 밖 세계도 더 알고 싶고, 다른 계절의 풍경도 더 느끼고 싶고, 지구별 밖의 우주도 궁금하다.  그래서 나의 생활은 책을 읽는 시간과 읽지 않는 시간으로 구분될 만큼 즐거운 읽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렇게 읽기에 대하여 글쓰기를 제안한 지인의 덕분으로 쓰기의 즐거움을 알아버렸다.

 사랑을 할 때 나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읽고 쓸 때도 내가 새롭게 발견된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는 일. 사랑하고 읽고 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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