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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운 Apr 15. 2024

명왕성에서 온 편지

보이저 1호 힘내라!

우리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의 장점 중 하나는 바로 옆에 어린이 도서관이 있다는 점이다. 유치원도 이 점을 십분 활용하여, 매주 아이들이 스스로 책을 빌리도록 하는 도서관 활동을 한다. 그것도 아이 스스로 읽고 싶은 책을 고른다고 하니, 책을 빌리는 습관도, 책을 읽는 습관도 잡기 좋다.


아직 아이가 어려 책을 빌리는데 선생님이 도와주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빌려온 책들을 보니 우리 아이가 딱 좋아하는 주제의 책이다. 이건 백 프로 자기가 직접 고른 것임에 분명하다.


첫 도서관 활동에서 빌려온 책은, 자기 말로는 화산 책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책 표지는 화산 같았지만 산불 관련 동화책이었다. 그럼에도 산불 책이라고 하면서 잘 읽었다. 그 책을 반납하고 지난주 새롭게 빌려온 책은 아래와 같다.


명왕성에서 온 편지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책


표지 디자인도, 책의 상태도, 내부 디자인도 연식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특히나 '명왕성'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최소 2000년대 초반에 나온 책임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명왕성은 2006년에 태양계에서 퇴출되었으니 말이다.




우리 아이가 빌린 책 제목인 '명왕성에서 온 편지'와 딱 어울리는 사진 한 장이 있다.


'창백한 푸른 점' 지구 (출처 : NASA)


1990년 2월 14일, 나사(NASA)의 태양계 탐사선 보이저 1호는 명왕성 궤도를 지나며 지구를 촬영한다. 지구로부터 약 60억 km 떨어진 우주에서 찍은 이 사진은 역사상 가장 유명하면서 가장 철학적인 우주 사진으로 꼽히는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다.


태양계 외곽을 탐사하는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보이저 1호는 1977년 발사된다. 이 우주선은 목성, 토성을 비롯한 태양계 바깥에 있는 행성과 이들의 위성사진을 지구로 전송하며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보이저 1호가 당시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이었던 명왕성 궤도를 넘어 더욱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시점.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당국을 설득하여 보이저 1호의 카메라 방향을 바꾼다. 바로 지구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이렇게 인류 역사상 가장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찍은 지구 사진이 탄생한다.


'창백한 푸른 점'이란 별칭은 칼 세이건이 이 사진에 영감을 받아 쓴 저서 <창백한 푸른 점>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저서에서 칼 세이건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점인 지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이 작은 점 위에서 살아가고 있고, 우주적 관점에서 우리의 존재는 얼마나 하찮은가? 우리가 겪는 전쟁, 분쟁은 물론 개인들의 욕심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상기시켜 준다.


그렇다고 허무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며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자는 것이 칼 세이건의 메시지이다. 이 드넓은 우주에서 아직 우리 인류가 이주할 곳은 없으며, 좋든 싫든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은 지구 밖에 없다. 우리의 유일한 보금자리인 창백한 푸른 점에서 우리는 공존해야 하며, 미래 세대를 위해 지구를 보존하고, 우주의 다른 문명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그는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아직도 보이저 1호는 우주를 항해하고 있다. 인류가 만든 피조물 중 가장 멀리 날아간 보이저 1호는 현재 지구로부터 약 240억 km 떨어진 성간 우주(interstellar space)에 있다. 점점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는 보이저 1호에게서 안 좋은 소식이 들린 것은 2023년 11월이었다.


보이저 1호 통신 두절을 알리는 뉴스들 (뉴스 공개는 12월이며, 통신 두절 시점은 11월)


이후 나사의 과학자들은 보이저 1호와 소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게 된다. 심우주에서 4개월 넘게 통신이 끊겼던 보이저 1호와 연락이 닿은 것은 올 3월. 나사에서는 보이저 1호가 다시 신호를 보내왔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 온전히 복구가 된 것이 아니라, 나사의 과학자들은 원격으로 보이저 1호를 고치기 위한 패치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무려 240억 km 가 떨어진 거리에서 이뤄지는 원격 작업이다.


하지만 통신이 복원되더라도 우리가 보이저 1호를 추적할 수 있는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보이저 1호의 동력원인 방사성 동위원소 열전 발전기(RTG)의 수명이 2030년까지이기 때문이다. 2030년 이후 보이저 1호의 전원은 꺼지게 되고, 우리는 더 이상 소통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보이저 1호가 멈추는 것은 아니다. 전력이 다 떨어져도 관성의 힘으로 우주를 계속해서 항해한다. 300년이 지나면 태양계의 외곽인 오르트 구름을 지날 것이고 1만 6,700년 후에는 지구와 가장 가까운 별, 프록시마 센타우리에 도착하게 된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보이저 1호가 가지고 있는 황금 레코드 판이다. 여기에는 60개 언어로 된 인사말, 지구의 이미지, 음악이 담겨 있다. 보이저 1호는 단순 우주 여행자가 아닌, 다른 문명과의 첫 만남을 위한 메신저이다. 만약 외계 생명체가 이를 발견한다면, 그들에게 우리의 문화와 인사말을 전달하는 것이 보이저 1호의 마지막 임무이다.


보이저 1호의 황금 레코드




영문 아이디를 정해야 하는 시기는 보통 심연의 흑염룡(黒炎竜)이 날뛸 때이다. 나 역시 중, 고등학생 때 영문 아이디를 처음으로 결정하였다. 당시 나는 흑염룡을 제어하지 못하고, 뭔가 있어 보이는 영어 단어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때도 우주를 좋아했기에,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을 찾아 헤매다가 주목하게 된 것이 명왕성. 태양계의 마지막 위치라는 점도 흑염룡의 마음에 쏙 들었고, 다른 행성들과 달리 쌍성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도 흥미를 끌었다. 무엇보다 태양계에서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 역시 흑염룡의 선택을 받기에 딱이었다.


그래서 이후 나의 아이디에는 명왕성을 상징하는 'Pluto'가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도 나의 아이디에는 명왕성이 있다. 아이가 빌려온 책의 제목을 보며 피는 못 속이는 건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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