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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운 May 07. 2024

이런 스포일러는 언제든 환영

나는 네가 무슨 일을 할지 다 알고 있다

2020년 12월생인 우리 아들은 올해 2월 어린이집을 졸업했다. 유치원도 아니고 어린이집 졸업식이기에 졸업장만 받고 끝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졸업식을 2~3주 앞둔 시점부터 아이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한다. 


"아리아! 행복의 날개 틀어줘!"

"아빠! 행복의 날개 춤은 이렇게 추는 거예요!"

(아리아는 인공지능 스피커를 호출할 때 사용하는 명령어)


평소 인공지능 스피커로 자주 듣던 노래가 아닌, 한 번도 찾지 않던 생소한 제목의 노래를 요청하는 녀석. 늘 듣던 뽀로로나 헬로카봇 노래가 아니라서 의아해하면서 아이가 찾는 노래를 틀어줬다. 그러니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가사를 잘 들어보니, '아빠 사랑해요, 엄마 고마워요, 이제는 내가 지켜줄게요'와 같은 내용이다. 졸업식을 앞둔 시점에 부모를 위한 노래와 율동. 


이쯤 되면 아이의 행동이 무엇에 대한 '스포일러(spoiler)'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어린이집에서는 졸업식 공연을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 하원 시켜주는 선생님께 슬쩍 '윤우가 요새 집에서 행복의 날개를 자꾸 불러요'라고 했더니, 선생님께서는 미리 알면 되는데 하며 난감해하신다. (선생님께 먼저 말씀드린 것은 졸업식 직전 이틀을 가족 여행으로 출석을 못해서 혹시 안무를 숙지하는데 문제가 있을까 여쭤본 것입니다)


역시 졸업식 당일 공연은 '행복의 날개'라는 노래를 아이들이 직접 부르며, 율동까지 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스포일러를 한 덕분에 무슨 공연을 하는지는 알았지만, 스포일러를 당했음에도 아이의 어린이집 졸업 공연은 그저 감동스럽기만 했다. 






중요 이벤트의 내용이나 결말을 미리 알려주어 김을 빼는 행위인 스포일러. 인터넷과 같은 소통 수단의 발달로 스포일러가 퍼지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반전이 유명한 영화들이 개봉할 때마다, 스포일을 하려는 사람들과 이를 피하려는 사람들 간의 신경전이 넷상에서 벌어지곤 한다. 


스포일러로 가장 유명한 영화는 단연 1995년 개봉한 <유주얼 서스펙트> 일 것이다. 'XXX가 범인이다'라는 충격적인 결말은 영화를 안 본 사람조차 알 정도였으니, 이 영화의 결말이 선사한 센세이션은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영화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스포일을 당한 후에 영화를 봤다는 것. 그만큼 누가 범인인지 스포일러 해주는 매체가 많았다. 영화가 멀티플렉스 시대 이전에 개봉한 탓도 있다.


1999년 개봉한 <식스 센스>는 본격 스포일러의 시대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스 센스 역시 반전으로 유명하기에, 아무것도 모른 채 꼭 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식스 센스 개봉 당시에는 국내에 PC통신이 활성화되어 있어 결말을 스포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포일러를 당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속속 생겨나게 된 영화가 바로 식스 센스이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지만, 식스 센스를 보기 위해 줄을 선 관객들에게 중요 스포일러를 외치고 간 사람도 있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유주얼 서스펙트 명장면 / 식스 센스의 꼬마


스포일러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 미디어에서 강력한 반응을 이끌어 낸다. 스포일러를 퍼트리는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비난을 받게 되고, 강퇴를 당하는 등의 제재를 받기도 할 정도로, 스포일러는 예의범절과 관련이 되어있다. 스포일러와 같은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스포일러를 공유하며 그룹 내에서 튀어 보이려는 욕구를 마구 발산한다.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제작자들은 두 발 벗고 나선다. 1960년 개봉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사이코>는 스포 금지의 시초라 꼽힌다. 히치콕은 영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1분이라고도 꼽히는 샤워 장면을 스포일러 하지 말 것을 관객들에게 강력히 요청했다. 이것도 모자라다 판단한 히치콕은 영화 개봉 전 각 서점에 있는 원작 소설도 모두 회수됐다고 한다. 스포일러를 막기 위한 거장의 노력이 눈물겹다. 


스포일러를 피할 수 없으면 작가가 하는 경우도 있다. 먼저 결말을 알려주고 가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경우, 시작하자마자 예언자가 결말을 예언한다. 관객들은 오이디푸스가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할 것을 알고 있었고, 작가는 극의 긴장감 조성을 위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초반부에 이미 두 주인공이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지속해서 등장하는 '운명'이라는 덫에 의해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관객이 새드 엔딩임을 알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극의 흐름을 따라가며 주인공들의 선택과 운명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기에 아직도 이 작품은 명작의 반열에 올라있다. 


영화 사이코에서 유명한 장면의 도입부 /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이처럼 스포일러는 우리를 화나게 하고,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게 된다. 제작자 역시 스포일러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럼에도 인간의 본능 때문에 스포일러가 퍼지는 것은 막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간혹 스포일러 당해도 좋은 경우가 있다. 글 서두에 언급한 아이의 스포일러가 바로 그것. 


5월 5일 어린이날 연휴를 맞아 아이는 선물도 받고, 놀러도 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어린이날이 좋다며 함박웃음을 짓다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버이날은 뭐야?"

"유치원에서 어버이날 만들고(?) 있어."

"어버이날 '엄마아빠 고마워요 사랑해요'라고 이야기해야 한데."


다시 아이의 스포일러가 시작되었다. 

어버이날을 맞아 무언가를 만들고, 부모에게 할 이야기를 연습하는 모양이다. 


또 스포일러를 당했지만, 

이런 스포일러는 언제든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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