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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메르인 May 18. 2023

직장인 상대성이론 (상) : 꽃길

예전 사외이사 중 낙하산이 한 분 있었다. 계열사 회장님과 대학교 때 친하게 지낸 인연 덕이었다. 우리 회사를 정년퇴임하여 야인으로 지내다가 극적으로 금의환향했다.


꽃길의 3D 프린터 출력물 같은 분이었다. 회사 생활 내내 갑의 위치인 부서에 있었다. 호감 있는 외모와 태도를 가졌고, 남에게 싫은 소리 들을 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드물게 청년의 순수함을 끝까지 간직했다. 사람들도 주변에 많이 모였다. 업무능력은 상반된 평판이 상존했다.


이사님과 저녁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꽃길만 걸은 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나 많이 힘들었어. 회사에서 승진도 늦게 됐지, 미국 지사를 보내주니 이제야 회사에서 좀 받는 게 있네 싶었다니까"


승진이 늦게 된 것은 몰랐다. 결국 사외이사로 돌아온 데다가, 직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미국 지사를 보내주니'에서 고생담이라기엔 좀...


하지만 그때 힘들었다는 말은 진정성이 있었다.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동기보다 한두텀 늦게 승진하는 것, 가고 싶었던 해외 지사를 겨우 가는 것이 그분의 시련이었다.


본인의 희망과는 다르게 인기 없는 부서를 전전하고, 회사에서 잘 나가지 못하니 사람들이 따르지 않고, 임원이 되지 못한 채 퇴직하는 것은 선택지에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호텔 재벌 힐튼 그룹의 상속녀 패리스 힐튼은 의류, 화장품 등의 브랜드를 성공시켰다. 스스로를 자수성가라 칭한다. 집안에서 돈 한 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안의 후광으로 성공했다는 오해(?)가 억울하다고 했다.


일단, 집안의 금전적 지원이 없었다고 믿기가 힘들고 (사업은 용돈으로 했나? 용돈은 누가 준 걸까?) 둘째, 금전적 지원만이 지원이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혹은 순진함을 가장한 영악한) 것이다. 재벌의 상속녀라는 네임밸류,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사업자 집안의 분위기 등은 그만이 가질 수 있는 무형의 재산이다. 본인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걸 대부분의 사람은 갖지 못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디폴트 값이다. 원래부터 있어서 자기와 분리하여 생각하기 힘들다. 그걸 기준점으로 해서 증감되는 게 인생의 굴곡일 거다. 모든 사람은 시작점이 다르다. 100에서 시작한 사람도 90이 되면 10만큼 떨어진 거다. '너는 어차피 50보다는 크잖아'는 위로가 안된다. 그래서 1:1로 비교할 수 없다.


최근에 후배 하나가 말을 걸었다.


"선배님이 부러워요. 승진도 제때 하시고, 가족도 화목하고, 노후 걱정도 없으시고.."


승진도 동기들보다 꽤 늦었고, 굴곡 있는 가족사를 그 자리에서 밝힐 순 없고, 노후 걱정도 한 바가지였지만 후배의 환상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남의 고민을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누군가는 꽃길을 걷는 자의 투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니.


나도 나름대로 직장에서 힘들었다고 자부(?)했었다. 육아휴직 때문에 동기들보다 승진이 한참 뒤처지고, 주변 도움 없이 육아와 직장일을 병행하느라 원하는 커리어도 갖지 못했다고 여겼다. 나는 왜 이리 안 풀릴까 하고 자책하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깨달은 건, 부러워 보여도 누구든 나름의 고민과 문제가 있다는 거다. 종류가 다양할 뿐이지. 다들 남의 시련에는 관심이 없다. 가지지 못한 걸 부러워할 뿐이다. 남과 비교하여 스스로 초라해지는 건 손해다. 꽃으로 가득하진 않아도 나의 길을 걸어가면 된다. 가면서 드문드문 꽃이 보일 때마다 소중히 여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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