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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메르인 Jun 01. 2023

배틀트립에서 완급조절의 중요성

홍콩, 싱가포르 출장기

홍콩 대 싱가포르 배틀트립을 의도한 건 아니었다. 사정이 생겨 두 사무소를 묶어 출장 가게 되었다.


홍콩 사무소는 우리 출장단이 코로나 이후 첫 방문이었다. 새로 부임한 사무소장은 정성껏 칼을 갈았다. 방문 일정을 알리자마자 식사 메뉴와 일과 후 일정 선정에 공을 들였다.


"나 요번에 다 쏟아부었어요. 팀장님은 예전에 홍콩 사무소에 있었으니 보면 알 겁니다."


반면 싱가포르 사무소는 차분했다. 그간 손님이 꽤 다녀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다소 시큰둥해 보였다. 이대로라면 홍콩이 승기를 잡은 듯했다.




[첫째 날]  홍콩 국제공항


홍콩에 도착했을 땐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맘때 홍콩 같지 않았다. 홍콩 소장의 완벽한 계획은 처음부터 살며시 금이 갔다.


"아유, 날씨가 안 도와주네.."

"시원해서 좋은데요..."


포세이돈도 아니고 날씨를 무슨 수로 통제하는가.


홍콩은 망한 부잣집 같은 도시다. 영국의 아편전쟁 승리 후 150년의 조차(租借) 기간은 1997년 7월 1일로 끝났다. 동서양이 조화롭게 결합된 관광과 금융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은 쇠락 중이다. 중국 앞 반환 이후 50년 동안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유지키로 했다지만, 중국은 일찌감치 홍콩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나는 코로나 이전에 홍콩 사무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특히 2019년은 국가보안법을 반대하는 시위가 극심했다. 홍콩 사법부의 자율성을 축소하고 시위대 처벌을 용이하게 하는 목적의 법이었다.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하여 버스가 운행되지 못했고, 학교도 몇 주간 휴교에 들어갔다. 많은 외국계 회사가 홍콩을 떠났다. 상당수가 아시아 본부로 싱가포르를 대신 선택했다. 홍콩 사무소에 손님이 없었던 것도 알만했다.


출장단은 저녁식사를 위해 전통 홍콩요리를 선보이는 식당으로 안내됐다. 청경채볶음, 북경오리, 양주식 볶음밥, 쇠고기볶음국수, 마파두부 등등 요리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요리가 총 11개가 나올 겁니다! 총무가 하나하나 먹어보고 골랐어요. 이 샴페인은 영국 다이애나비가 결혼할 때 나왔던 거고, 홍콩은 일정 도수 이상 술은 세금이 없어요. 이건 뭐냐면......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네 시간 비행기를 타고 왔다. 오후 회의까지 마치고 온 터라 정신은 몸과 분리되어 식당 어드메를 떠돌고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홍콩섬에서 제일 높은 피크로 데려갔다.


"안개가 끼어 야경이 잘 안 보이네. 날씨가 좋아야 하는데...."

"분위기 있어 좋은데요..."


방에 돌아오니 열한 시가 넘었다. 자려고 누웠지만 11개의 요리가 소화되지 않은 채였다.



[둘째 날] 홍콩섬 완차이 소재 호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도 허기가 돌지 않았다. 오전 미팅 두 건, 비즈니스 런치, 사무실 회의를 마치니 피곤이 몰려왔다.


"오늘은 바다 건너 구룡반도 쪽으로 가볼 겁니다. 홍콩 왔으면 페리 한 번 타 봐야지요."


찐 새우, 당면가리비, 가루파생선, 크랩찜, 모닝글로리 볶음, 양주식 볶음밥 등 요리가 또 쏟아졌다.


"오늘은 요리가 좀 적어요. 9개밖에 안되가지고. 그래도 해산물은 먹어봐야죠. 싱가포르 가면 이런 거 먹겠어요? 거긴 칠리크랩밖에 없을 텐데. 술은 몽지람이라고 유명한 백주인데, 이걸 어떻게 구해왔냐면...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밖은 비가 내리는데 에어컨은 왜 이렇게 빵빵한지. 피곤과 추위가 겹쳐 몸살각이었다.


"잘 드셨죠? 이 근처에 야경 좋은 펍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맥주 한 잔 하고 갑시다."


다들 맥주를 시키는 분위기 속에서 생존을 위해 뜨거운 생강차를 주문했다. 소장 본인도 냉방병으로 감기가 걸렸는데 링거투혼을 발휘하는 중이란다. 여긴 어딘가, 나는 또 누군가.. 다시 유체이탈을 하기 시작했다.


"싱가포르 가봤자예요. 볼 것 없이 홍콩의 4:0 승리야."


출장단 네 명을 배틀트립의 심사위원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열한 시가 넘어 호텔방에 돌아와 누웠다. 몸이 천근만근이라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셋째 날] 싱가포르 창이 공항


싱가포르 사무소는 지난 1년 간만 해도 30팀 넘게 방문했다고 했다. 공항에는 직원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지인 기사 없이 직접 운전해서 출장단 네 명을 세단 한 대에 태웠다.


"시간이 어중간하니까 일단 호텔에서 좀 쉬시다가 저녁식사하러 같이 가시죠."


일단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마리나 베이가 보이는 노천식당에서 홍콩 사무소의 예상대로 칠리크랩을 먹었다. 날씨가 무더워 시원한 맥주가 어울렸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데려다줬다. 피트니스 클럽에 가서 사이클을 탈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넷째 날] 싱가포르 중심업무지구(CBD; Central Business District) 소재 호텔


둘째 날 출장 일정을 소화한 뒤, 저녁식사 장소는 도보 거리의 회원제 레스토랑이었다. 아시안, 인도, 이탈리안 요리를 골고루 시키고 화이트 와인과 싱가포르 슬링이라는 칵테일을 곁들였다.


"요번 일정이 붙어있다 보니까 홍콩 사무소에서 라이벌 의식이 생기나 봐요. 식사메뉴는 홍콩이 훨씬 맛있을 거라고 자랑하더라고요. 근데 일정이 좀 빡빡하긴 했어요."

"아유 말도 안 되죠. 이건 저희가 이기죠. 왜 다 손님들이 싱가포르로 오시겠어요. 그리고 출장단이 오면 개인시간을 좀 줘야죠. 계속 그렇게 끌고 다니면 안 돼요."


대세는 싱가포르라는 여유가 있었다. 경험에서 나오는 노련한 완급조절이 일품이었다. 식사 후 다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가시고 싶은데 있으면 안내해 드릴게요."

"마리나 베이 샌즈 몰에 가보려고 해요."

"아 그럼 저희가 근처까지만 모셔다 드릴 테니 편하게 둘러보세요."


몸과 마음이 편한 일정은 싱가포르였다. 그래도 홍콩 사무소장님의 열정이 마음에 걸렸다. 어느 쪽에 한 표를 줄지 어려운 선택이었다.




[배틀트립 심사 결과]


직원1: "둘 다 좋았어요. 싱가포르는 호텔이 좋고, 홍콩은 잘 챙겨 주시고. 근데 저한테 개구리 고기를 몰래  먹인 홍콩에 표를 주고싶진 않네요. 뭔가 당한 느낌이었어요."

(나: "내가 따로 비즈니스 런치할 때 사무소 직원들과 먹더니 그때 당한건가요? 소장님은 그렇게 열심히 뛰셨는데. 직원들이 도움이 안 됐군요...")


직원2: "홍콩이죠. 11개/9개 코스요리는 정말 배불렀지만 표내지 않고 열심히 먹었습니다."

(나: "배부른 표가 전혀 나지 않았어요.")


직원3: "우열을 가릴 수가 없네요. 기권입니다."


현재까지 1:1이다. 캐스팅보트는 나에게 주어졌다.


: "내 취향은 싱가포르인데, 밥 적당히 먹고, 자유시간 있고. 그래도 홍콩의 진정성에 한 표 드립니다."



진심은 통한다. 홍콩 2:1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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