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마셨다고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논과 플로피의 세 머리를 보고 삼신은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네 쌍의 눈이 대답을 기다리며 삼신의 입만 바라봤다.
“저도 모르겠네요. 그건…”
실망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논이 한숨을 푹 내쉬자 덩달아 플로피들도 차례대로 ‘훅'하고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논님은 왜 기억을 찾으시려고 하시죠?”
“그거야… 그거야…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
삼신의 질문에 논은 주저 하다 대답을 이었다.
“처음에는 제 존재를 알고 싶어서였어요.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억을 잃어버려서 그렇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이곳에 오신 영혼분들이 모든 전생의 기억을 되살리며 편해하시는 것이 부럽기도 했고요. 그다음은 이 씨앗… 의 주인분을 만나고 나서였어요. 단편이지만 떠오르는 기억들이 힘들었습니다. 그 기억이 제가 여기 있는 이유와 관계가 있을 거 같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이곳에서 많은 영혼분들을 보며 당장의 삶들이 그때는 그게 다일 거 같지만 결국은 정말 큰 흐름 속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이제는 그저 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이곳에서 제가 할 일이 뭔지 궁금할 뿐이에요.
하지만 몰라도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저도 저는 마음에 들거든요.”
“그렇군요.”
삼신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따뜻한 눈으로 논을 바라봤다.
“이곳 영혼의 빛은 이곳의 생명들, 즉 말라크나 이곳에 오신 영혼분들께 영향을 끼치지요. 혼수상태의 인간들처럼 인간세계에 속한 이들이나 지옥에 속한 이들에게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논님은 말 그대로 이곳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으나 그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은 자로 영혼의 빛이 반응을 하지 않는 게 맞습니다. 다만…”
“다만… 이요?”
삼신은 대답 없이 논의 몸에 손바닥을 가만히 대보았다. 그러자 논의 몸과 손바닥 사이에 옅은 주홍빛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일렁였다.
“논님에게 변화가 생긴듯합니다. 영혼의 빛이 논님을 거부하지 않네요. 조금 기다려보세요. 때가 되면 저절로 모든 걸 알게 될 겁니다.”
삼신의 말에 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몸에 주황빛을 일렁이는 채로 생활하며 시간이 흘렀다. 논의 몸에 빛나는 빛은 평소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유달시리 삼신을 만나거나 디아를 만날 때면 춤을 추듯 크게 일렁였다.
영혼 7777번의 빛을 뿌리고 3 삼신국에서 받아온 비료까지 뿌리자 그동안 환생을 기다리던 많은 영혼의 꽃들이 싹을 피우고 꽃을 피웠다. 정식 말라크가 아닌 논과 플로피는 상담업무나 점지업무를 직접 할 수 없었지만 여기저기에서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디아가 지옥에 볼일을 보러 떠나며 논과 플로피는 서로 만날 틈도 없이 이곳저곳에 불려 다녔다.
“커… 커… 논!”
“플로피… 보고 싶었어!”
플로피가 환생국에 온 이래로 처음으로 삼일동안 마주치지 못했던 논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집 앞에 기다리고 있는 플로피를 보고는 냅다 뛰어 플로피를 꼭 껴안았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어떻게 그렇게 못 마주치지?”
“논, 너는 어디 있었나? 나는 환생 상담지와 영혼 마을에 있었다. 가끔 환생궁도 갔는데 갈 때마다 네가 없었다. 논.”
“나는 환생꽃밭에 일이 너무 많았어. 바르 따라다니느라 삼신님도 못 만났다니까…”
“그런데, 논… 몰골이 왜 이러냐?”
플로피는 꼭 껴안고 있던 논의 몸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떼더니 세 머리가 논의 여기저기를 킁킁 냄새 맡기 시작했다.
“논, 안 씻었나? “
“논… 냄새난다.”
“비료 냄샌가?”
“영혼의 빛 비료가 왜 똥냄새가 나냐?”
플로피들이 놀리는 소리에 논도 자신의 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봤다.
“아무 냄새도 안나잖아.! 플로피!”
논과 플로피 세 머리는 깔깔 대며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 디아도 보고 싶다. 플로피, 디아는 왜 지옥에 간 거야?”
“디아는… 찾는 이가 있다.”
“찾는 이?”
“디아가 이곳에 오기 전 인연을 맺은 인간 영혼을 찾는다고 들었다. “
“이곳에 오기 전이라면… “
“우리가 인간으로 살기도 더 전 이야기지. 인간의 시간으로 천년 도 더 된 이야기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찾았으면 좋겠네.”
“배고프다. 논… 밥 먹자.”
논과 플로피는 집으로 들어가 씻고 각자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저녁식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논은 자신이 다시 붙인 씨앗을 들고 환생의 밭으로 들어갔다. 보통 영혼의 빛은 삼신이나 상담을 마친 말라크들이 화분에 심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환생의 밭으로 옮겨서 관리를 받게 되는데, 이 씨앗의 경우는 영혼의 빛을 잃으며 화분에서 심을 시기를 놓쳐 삼신과 상의 후 원인 제공자인 논이 직접 밭에 심기로 하였다.
이른 새벽 첫 햇살이 땅을 데울 무렵 논은 씨앗을 들고 밭으로 들어갔다. 삽으로 얇게 구멍을 파고 유리병에서 씨앗을 조심히 꺼내었다. 밝지는 않지만 노란빛이 씨앗을 감싸고 있었다.
“내 전생에 어머니였을지도 모를 당신, 당신을 용서한다고는 못해요. 하지만 이렇게 당신이 휴식을 취하고 환생을 하게 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요. 이제 편안히 쉬세요. 당신의 다음 삶을 위해서…”
논은 구멍에 씨앗을 넣고 흙을 살살살 덮었다. 그리고 영혼의 빛이 섞인 물을 그 위에 뿌렸다. 물을 뿌리자 촉촉해진 흙에서 순식간에 싹이 올라왔다. 크지 않지만 튼실한 떡잎 두 개가 빛나듯 반짝였다. 논은 조심히 잎을 만져보았다. 그 순간 논의 몸에서 주황빛이 요동을 치더니 온몸을 감싸 안았다.
“저리 꺼져. 너 같은 애는 필요 없어.”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 꼴이 된 거라고!”
“미안해.. 미안해… 지영아. 하지만 이게 너를 위한 최선이야. 꼭 찾으러 올게.”
“고아 주제에…”
“너 버림받았다며.. 고아원 산다며.”
“엄마가 있다고? 너 버리고 간 게 뭐 엄마라고… 넌 고아라고.”
자신을 향한 비난의 소리들과 거침없는 학대의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리고 논의 눈앞에 교복을 입은 어린 소녀와 수 명의 소년들이 보였다. 폭행과 유린, 한두 명이 아닌 아이들 그들은 고아이고 힘없는 소녀를 긴 시간 동안 유린했다. 언론에 알려지며 재판이 이뤄졌지만 오히려 경찰은 소녀에게 그들에게 아량을 베풀라고 그들의 삶을 이렇게 끝낼 거냐고 했다. 죄를 지은 수십 명의 아이들 중 소년원에 간 아이들은 열여명 그나마 그들도 이년 정도의 짧은 형벌을 살았고 나머지는 집행유예, 그리고 아예 재판을 받지 않은 아이들 조차 있었다. 소녀는 삶이 너무 힘들었다. 뭔가 새롭게 시작을 하려 해도 과거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렇게만 있어서는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에 어른이 된 소녀는 제대로 정신치료를 받아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날 상담을 받으러 간 병원에서 어른이 된 소녀는 자신을 범했던 소년을 의사로 만났다. 그리고 그날 밤 어른이 된 소녀는 삶을 스스로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의자 위에 올라가 목에 수건을 걸고 눈을 편안히 감았다.
철퍼덕…그 순간 논의 몸의 기울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논을 발견한 것은 조금 뒤 꽃밭에 출근한 바르였다. 바르는 논을 업고 뛰어 삼신에게 갔다. 삼신은 순간이동으로 논을 그녀의 집에 있는 침대에 눕혔다.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니 걱정 말라는 삼신의 말과 달리 논은 며칠 동안 꼼짝도 않은 채 잠을 자듯 그렇게 일어나지 못했다. 지옥에서 돌아온 디아와 플로피가 밤낮으로 논을 보살폈지만 논은 눈 한번 뜨지 않고 손가락 하나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미동도 없이 그대로 누워있기만 했다.
논은 또다시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에서 걷고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 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사방이 하얀 벽뿐… 자신이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좁은 하얀 벽은 걸어도 걸어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논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가냘픈 다섯 개의 손가락이 뚜렷하게 보였다.
‘네 이름은 논….’
‘논… 나는 디아야’
‘반갑다 논… 우리는 플로피다.’
‘논님… 저는 삼신입니다.’
자신을 부르며 인사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은… 논…”
논이 입을 떼고 이야기하자 순식간에 하얀 벽이 무너지며 눈부신 빛이 가득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논은 공간을 이리저리 살피며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눈앞에 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아른거리며 나타났다.
“논… 기억을 찾았느냐?”
빛 속에서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당신은… 당신은 신…그러니까 흐름입니까?”
“그렇다. 나는 흐름이다.”
“왜… 저를 벌하지 않았나요? 저는 결국… 제 삶을 끝낸 자입니다. 자살은 재판 없이 지옥행이라 들었습니다.”
“지옥행이라… 벌을 받는 삶이 모두 지옥행이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
“제 삶이…가련해서 벌을 그 정도에 멈춘 거라면 차라리 삶을 도와주시지 그랬어요. 그렇게 태어나 살 거면 아예 태어나지 않게 하셨어야죠. 왜 살 때 도와주지 않고… 왜!!!”
“나는 흐름일 뿐… 인간의 삶은 인간이 정한단다.”
“당신이 신이라면… 적어도 나를 도와줬어야지! 내가 살아갈 때 신이 존재한다고 믿게 해 줬어야지! 왜… 다 죽고 다 끝내고 이제야 나타나냐고!”
논은 온몸으로 울부짖다 털썩 주저앉았다. 벌써 끝난 일인데, 지난 생에서 벌어지고 자신은 삶을 끝내고 죄에 대한 벌도 받았는데… 그런데도 바로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분노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이럴 거면… 이럴 거면 기억을 돌리지 말았어야죠. 내가 이렇게 괴로워할 거 같으면 그냥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게 뒀어야죠. 왜! 이제야….”
논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깊은숨을 뱉어냈다. 그렇게 다시 흐느끼고 숨을 뱉어내고 다시 깊이 숨을 들이시다 논은 점점 자신의 몸이 작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논의 몸이 점점 줄어들더니 어린아이가 되고 아기가 되고 더 작아지며 태아가 되어 어떤 여인이 배속으로 들어갔다가 어둠 속에 묻혔다. 그리고 다시 빛이 보이더니 눈앞에 디아가 앉아있었다.
“영혼님, 준비되셨나요. 드디어 열 번째의 삶이네요. 마지막 삶은 어떻게 살아가고 싶으신가요? 여기 영혼님의 전생 포인트가 있는데요. 보시면 알겠지만 이번에도 정말 간당간당하게 환생국으로 오셨어요. 아무래도 랜덤환생을 하셔야 할 거 같은데요. 자… 이렇게….”
디아의 말이 끝나자 다시 한번 풍경이 바뀌더니 논은 저승으로 온 나이 든 노파가 되어있었고 노파는 다시 현생으로 돌아가 중년의 삶 청년의 삶 그리고 아이가 되었다가 다시 배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논은 자신의 전생들을 하나하나 다시 겪기 시작했다.
“영혼님, 다섯 번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셨네요. 어쩌면 이렇게 매번 포인트를 간당간당하게 해서 오실까요. 참 대단하십니다. 다음생애에선 포인트 조금만 더 쌓아오세요. 영혼님 여섯 번째 삶에서 못 뵐까 아쉽습니다.”
“영혼님, 두 번째 삶을 마치고 돌아오셨습니다. 지난번 삶에서는 그래도 선택권이 하나라도 있으셨는데, 이번 삶은 선택권이 아예 없으십니다. 이럴 경우 랜덤환생이라는 게 있는데요. 자 여기 보시면…”
“영혼님, 첫 번째 삶을 마치고 돌아오셨네요. 영혼님은 현재 인간으로서 첫 삶을 살고 돌아오셔서 전생의 기억은 하나만 가지고 계십니다. 첫 번째 여행은 어떠셨어요?... 여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환생을 하기 위해서는 선행 포인트라는 게 필요한데 영혼님이 쌓으신 선행포인트가 이만큼이고 지으신 죄는 이쪽에 적혀 있어요. 선행 자체가 적은 건 아니신데 그만큼 지은 죄도 많으셔서 지옥행은 아니시지만 최종 선행포인트가 환생의 선택을 고르기에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네… 여기를 보시면….”
그리고 다시 논은 인간의 모습으로 첫 번째 삶을 살고 그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영혼의 씨앗이 되어 땅에 묻혔다. 그리고 영혼의 씨앗이 되기 전 빛으로 돌아갔다.
선명환 주황빛은 허공을 떠돌다 자신을 끌어당기는 밝은 빛에게 다가섰다.
“이것이 제가 살아왔던 열 번의 삶인가요?”
맞다는 듯이 밝은 빛은 위아래로 흔들렸다.
“참 열 번의 삶을 간당간당하게 환생국에 왔네요. 저는 왜 매번 그렇게 살았을까요? “
“아직도 열 번째 삶이 너를 힘들게 하느냐?”
주황빛은 대답 없이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밝은 빛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더욱더 밝게 빛나더니 주황빛을 감싸 안았다. 주황빛은 자신보다 더욱 빛나는 밝은 빛에 빨려 들어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팔이 솟아나고 다리가 생기고 다시 인간의 모습을 갖춘 자가 되어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나무그늘 아래 앉아있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여기저기 울리는 새소리가 아름다웠다. 다시 모습을 갖춘 자는 하늘을 바라보다 털썩 그대로 뒤에 누워버렸다. 등에 뭔가 간질간질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시원한 바람이 좋아 그대로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라…”
“라파….”
누군가 자신을 깨우는 소리에 눈을 살짝 뜨니 가냘프게 뜬 눈 사이로 디아가 보였다.
“뭔 천사가 이렇게 아무 데서나 자.. 일어나 봐.. 라…”
이름을 불린 자는 다시 눈이 무거워 눈꺼풀을 닫았다.
“일어나 봐… 논!!! 논!!!!”
그 순간 논은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커다란 눈 여섯 개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플… 로피?”
눈물을 뚝뚝 흘리며 플로피 세 머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논에게 다가와 끄억끄억 울며 논의 몸에 얼굴을 살짝씩 부비 데었다. 논은 그런 플로피를 꼭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