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by 이엘

그렇게 지천과 성기가 대화하고 있는 와중에 제사장 천지는 신수 기린이 있는 곳까지 갔다.


신수 기린


신수이자


왕을 수호하는 수호수


그 기린이 이 혼란에는 무슨 신탁을 줄까?


천지왕의 신탁은 끊어졌지만


기린의 대답은 궁금했다.


그렇게 천지가 기린이 있는 곳까지 갔을 때


천지는 놀라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기린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었다.


기린은 원래 있었던 자리에 없었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었지만


미래에는 없는 것이었다.


천지는 그것을 보고 절망했다.


"정말로 신께서 천나라를 버리시려는가?"


천지는 그 갸냘픈 몸을 주저앉혔다.


남자로 태어나서 제사장까지 오는데 신의 존재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


신의 존재는 현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 신은 이제 사라졌다.


천지는 자신이 있을 곳을 알지 못헸다.


천지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알지 못했다.


하나




오랜 시간 동안 생각했다.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하면서


언젠간 지천이 했던 말을 생각했다.


"인간의 시대가 왔네."


인간의 시대


신의 시대가 가고 인간의 시대가 왔다는 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더이상


신의 신탁에 의존하지 않고


왕을 간택할 수 있다.


어차피 정하기 나름이다.


이제 신이 사라졌으니


이제 정치가 왕을 정한다.


이제 힘이 왕을 정한다.


제례는 그저 요식행위일 뿐이다.


정치로 신을 만든 후 그 거짓 신에게 정통성을 받는다.


천지는 그렇게 생각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제 제사장인 나도 선택을 해야 한다. 천지왕의 가호가 갔고 인간의 가호가 도래했음을."


기린이 실종되고 다음 날


민중 봉기군 지도자 주는 사발 통문을 곳곳에 뿌렸다.


사발 통문의 내용은


이제 인간의 시대가 왔다는 것


천나라는 그 명맥이 다했다는 것


왕 걸은 왕의 자격이 없다는 것


등이었다.


사발통문을 받고 모인 사람들은 무려 2만 명이었다.


청동 낫


청동 칼


돌 보습


나무 몽둥이 등을 들고 그들은 집결했다.


주는 외쳤다.


"이제 천명은 백성에게 있다!! 해나래가 쌍성일을 끝내고 천명을 하늘에서 백성으로 옮겼다. 이제!! 백성의 지지를 받는 자가 왕이다!!"


그 말에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주는 현령 하나를 잡아 직접 목을 벨 준비를 했다.


왕이 임명한 지방관을 죽이는 건 반역


주는 반역을 할 셈인 것이었다.


그 지방관은 이미 끝났다는 듯이 말했다.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주게... 젠장 내가 왜 걸 따위를 왕으로 섬겨가지고!!"


주는 말했다.


"소원을 들어주지."


그는 청동 칼로 그 지방관의 목을 쳤다.


그리고 장대에 지방관의 목을 매달았다.


반역의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주를 따랐다.


주는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왕이 될 수도 있겠구나!!


내가 왕이 된다면


전조의 흔적은 모두 지운 다음


해나래를 신화화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천하를 갖겠지.


해나래는 전설이 되고


나는 천하를 얻는다.


그래


난세에는 누구든 천하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는 군을 진군시켰다.


반역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아직 성기가 구축한 파발 체계가 기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식이 전해진 후


정전에서 조정 회의가 열렸다.


왕 걸은 분노하면서 소리질렀다.


"감히 천명을 받은 왕에게 반역하디니! 일만의 대병을 동원해 반역자들을 모두 죽이고 주동자는 거열한 후 효수하라!"


하지만 그 말을 듣는 관료는 없었다.


성기만이 차갑게 대답했을 뿐이다.


"군사는 2천밖에 남지 않았고 양식도 부족합니다. 기마병은 없고 전차병은 더더욱 없습니다. 조정군은 말이 조정군일 뿐이지. 그저 창을 꼬나쥔 거지떼일 뿐입니다! 제발 현실을 아십시오!"


그 꾸짖는 말에 왕 걸은 발광했다.


"감히 네가 왕을 꾸짖는 것이냐? 여봐라 병부상서 성기를 죽여라!"


하지만 군사 중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왕 걸을 노려볼 뿐이었다.


관료들도


왕 걸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왕 걸은 처음으로 두려움에 질렸다.


아 난


호위병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지만 그 절망감을 감추기 위해 짐짓 큰 소리로 말했다.


"흣흠 특별히 병부상서를 사면해 주겠노라! 병부상서는 반역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도록! 그럼 나는 침실에서 허리 운동을 하러 퇴실하겠다."


그렇게 왕 걸은 꽁무니를 뺐다.


왕 걸이 자리를 비운 후 '정전'에서 제사장 천지와 기록을 담당하는 관청인 *홍문관의 *교리 정청은 병부상서 성기에게 물었다.


*홍문관: 국왕 자문 기관, 기록을 하기도 한다.


*교리: 문장을 담당하고 국왕에게 자문을 하는 중앙 관료


"왕은 언제 교체하실 생각이신지요?"


성기는 그 말에 옥좌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얼마 남지 않았네.. 선왕의 사생아를 찾았어."


홍문관 교리 정청 외 관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입니다. 병부상서."


병부상서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네 교체는 시작일 뿐이야."


그 말이 끝나고 관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천나라의 명맥은 잇겠다는 다짐인 동시에


왕 걸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성기는 정전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부관이 성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관은 성기에게 보고했다.


"선왕의 사생아를 찾았습니다."


"수고했네."


선왕인 요의 사생아 '허' 그는 작은 몸집의 어린아이였다.


사실 그는 사생아라고 말하기에도 뭣한 인물이다. 그는 왕 요가 상헌에게 보낸 여종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가 상헌의 아들인지 왕 요의 아들인지 불분명했다. 하지만


성기는 왕 걸의 '유지'를 조작해 그를 왕 요의 아들이라고 공인되게 만들 생각이었다.


유지


그러니까 유서다.


성기는 왕 걸을 죽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성기는 부관에게 물었다.


"그분은.. 내 방에 잘 계시느냐?"


부관은 답했다.


"네 잘 계십니다."


"그럼 가보게."


"네!"


부관은 인사를 올리고 사라졌다. 성기는 그 모습을 보고 한탄했다.


"우리 천나라의 정통성이 이지경이 되다니... 걸 놈이 정상이기만 아니 조금 모자란 놈이기만 했으면 어떻게든 이끌었을 텐데."


하지만 주의 반란군이 목전에 닥친 와중 빠르게 혼란을 수습해야 했다.


그는


결심했다.


이제 죽이기로


성기 뒤에는 기름통과 햇불을 든 군사 수십이 서 있었다.


성기는 그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가자."


성기는 햇불과 기름통을 든 군사들을 대동하고 왕 걸이 있는 침실로 갔다.


왕 걸은 그때까지도 미동과 변태적인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으며


옷은 벗겨져 있었다.


왕 걸도 옷을 벗고 있었다.


성기는 그 모습을 보고 흡사 짐승 같다고 생각했다.


인간으로써 혐오감과 경멸감이 밀려왔다.


내가 더 빨리 결단했다면


더 많은 미동이 죽는 걸 방지할 수 있었겠지.


왕 걸은 성기와 군사들이 온 상황을 이해 못하고 소리쳤다.


"감히 신하가 왕의 침실에 드나들다니 경을 치고 싶으냐!"


성기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침실 안의 모든 궁인과 미동을 내보내었다.


그리고 선언했다.


"니놈은 선왕과 다르게 인간의 자격이 없다. 선왕의 실수는 널 낳고 방치했다는 점이다!"


성기의 고함에 그리고 군사들의 서슬퍼런 낯빛에 왕 걸은 공포에 질렸다.


이 순간


그는 사냥개가 아니라


사냥감이었다.


왕 걸은 벌벌 떨면서 말했다.


"용서해 줄 테니 내 방에서 나가라..."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성기는 손을 올렸다. 그러자 군사들이 기름통에 있는 기름을 왕 걸과 주위에 뿌렸다.


왕 걸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고 벌벌 떨었다.


"살려다오! 아니 살려주십시오! 제발!"


성기는 그 말을 무시하고 걸의 몸에다 햇불을 놓았다.


그러자 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끄아아아아악!!!"


왕의 신성


왕의 권력


왕의 존엄


모두 탔다.


궁인과 미동들은 그 모습을 보고 비웃었다.


성기는 말했다.


“아무도 저 자를 도와주지 말라…”


성기가 '일'을 마치고 바깥에 나오니 관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홍문관 교리 정청은 병부상서에게 조작된 물음을 던졌다.


"왕의 침실에서 불이 나던데 혹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요? 병부상서?"


그러자 성기는 준비된 대답을 했다.


"왕께서는..궁내에 발생한 우연한 화재로 인하여 사망하셨습니다."


임금의 죽음은 붕어라 한다. 하지만 성기가 사망이라 부른 것은.. 그를 임금이라 인정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지였다.


홍문관 교리 정청은 그 말을 모두 목간에 적었다. 그리고 말했다.


"왕께서 돌아가셨다면.. 이제 선왕의 후계자에게 왕위를 계승시켜야겠군요."


성기는 그 말에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요 임금님의 사생아 허께서 지금 궁 안 내실에 계시니.. 지금 당장 왕위 계승식을 치릅시다."


"네!"


홍문관 교리 정청은 대답을 하고 관료들을 모으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야심한 밤


왕위 계승식이 요식으로 이루어졌다.


어린 소년 허는 그 갸냘픈 몸뚱이로 해를 상징하는 왕의 복장을 입었다. 왕의 복장은 커서 허의 몸집에 맞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건 왕의 자리가 어린아이에게 부당하다는 하늘의 의지가 아닐까?


하지만 비정한 어른들은 허를 왕위에 올렸다.


제사장 천지는 급조된 형식의 왕위계승 선언서를 낭독했다.


"천지왕의 계시에 따라 왕 요의 후계자인 허가 왕위에 오르니! 하늘의 가호가 깃들기를!"


천지가 문서를 낭독하고 허 그러니까 이제는 왕 허가 옥좌에 올랐다. 그런 허에게 성기가 대보를 전해주었다.


"여기 왕을 상징하는 국새입니다. 폐하."


왕 허는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그것을 받았다.


하지만 허는 책임감과 눈치가 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왜 자신에게 왕위가 떠맡겨졌는지 대강은 알았다.


그래서


두려움을 감추고 굳센 목소리로 좌중에 말했다.


"잘 부탁하오."


그 굳센 목소리는 성기에게 약간의 희망을 주었다.


저 어린아이가


아무리 어리더라도


위기를 해쳐나갈 잠재력은 있구나


라고 생각한 것이다.


성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왕에게 말했다.


"폐하, 폐하께서 즉위하셨으니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리셔야 하옵니다. 소신이 작성할 터이니 결재를 하시면 되옵니다."


왕 허는 그 말의 뜻을 알았다. 하지만 난세에 꼭두각시 임금이라는 것은...사람들에게 해악만 된다고 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허는 성기에게 말했다.


"아니오 조서는 내가 쓰고 내가 결재하겠소. 홍문관 교리 정청은 받아 쓰라."


정청은 왕 허의 말을 듣고 조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이여 짐은 선왕 요의 정통 후계자이자 천지왕의 가호를 받은 인간의 왕이다. 쌍성일의 홍수가 지나고 국가적 위기가 닥쳤다는 것을 짐도 잘 안다. 하지만 천지왕의 가호가 있으면 그 어떤 위기도 해쳐나갈 수 있다.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배고픔 때문에 도적이 된 자는 내 권한으로 죄를 감면해 주겠다. 그러니..."


왕 허는 큰 숨을 들이키더니 다시 말했다.


"그러니... 서로를 해치지 말아다오..."


왕 허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서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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