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을 보고

by 이엘

서론


1) 십자군 전쟁의 비인간성


기독교는 흔히 사랑과 용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자비와 관용을 주 덕목으로 삼는 종교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기독교 모태신앙이었던 나도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때는 그렇게 믿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사람이 사람을 종교, 학력, 민족 등의 세상적 기준으로 나누어 차별하지 않고 그로 인해 싸우지 않으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여 자신과 서로를 용서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믿음은 역사와 현재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고 세상은 어린아이들과 예수가 생각한 대로 굴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베드로가 죽고 세워진 로마 가톨릭은 신의 가르침을 곡해하여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러한 부정적인 모습만 보여주지는 않았다. 가톨릭은 중세에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빈민을 구제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행정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올바른 삶을 살라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가톨릭은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살던 초기의 모습과는 다르게 시대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 서로마 황제를 앞세워 비잔티움 제국과 대립했고 성직자 서임권을 두고 세속권력과 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청빈함을 버리고 부의 축적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종국에는 성지 탈환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이슬람권을 침공해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잊고 이교도 학살은 죄가 아니라는 헛된 소리를 내뱉기도 하였다. 제 4차 십자군 전쟁 때는 그러한 명목도 집어치우고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여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약탈하였다.


현재에 들어서는 종교의 이러한 모습은 공식적으로 사라진 듯 보인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세상과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혼탁하다. 사람들은 앞서 말했던 수많은 세상적 잣대들로 사람들을 나누고 공격하고 나를 포함한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그냥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고 심지어는 신의 뜻을 빙자해 자신의 죄를 덮으려는 그리스도인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혼탁한 세상이라도 소중하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 내게 ‘킹덤 오브 헤븐’이란 영화가 보였다. ‘킹덤 오브 헤븐’은 제 2차 십자군 시기를 다룬 영화로써 평화와 화합 그리고 종교와 신분을 넘어선 공존의 가치를 주제로 삼고 있는 영화라 들었다. 게다가 중세에 대한 고증도 잘 되어 있다는 소리는 역사학도인 나에게 흥미를 더했다. ‘킹덤 오브 헤븐’이란 영화는 과연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영화인가? 그러한 생각이 들어 나는 ‘킹덤 오브 헤븐’이란 영화를 보았고 조금 미흡했던 측면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 기대에 부합한 영화였다.


2) 킹덤 오브 헤븐과 감독 리들리 스콧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을 만든 감독 리들리 스콧은 1937년 11월 30일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1977년 그는 결투자들이란 첫 영화를 만들었다. 결투자들이란 영화는 뛰어난 영상미와 연출력을 돋보인 작품으로 평가되어 결투자들이라는 영화는 칸 영화제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리들리 스콧 감독은 이후로도 에이리언, 델마와 루이스, 로빈 후드, 1492 콜럼버스 글래디에이터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 중 글래디에이터는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


그의 영화의 특징은 화려한 영상미와 독특한 연출기법이다. 독특한 연출기법은 그의 역사영화에서 그 특징을 드러낸다. 그의 역사영화는 역사적 고증과 사실적 묘사를 기반으로 하지만, 그의 주제와 그것을 부각시키는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는 그것을 과감히 포기하기도 한다. 한 예로 글래디에이터는 복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역사적 고증을 거의 포기한 영화이다. 2005년에 제작된 킹덤 오브 헤븐은 중세시대를 정확하게 고증해 내었지만, 앞에서 말한 평화와 공존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적 가치 실현이라는 주제를 부각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이분법적으로 그려내었고 그리고 단순히 선과 악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인물들을 평면적으로 그려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평화와 공존이라는 주제를 가장 잘 나타낸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래 본론에서는 이 영화로 보는 역사와 실제 역사를 비교 분석하고 그때 역사의 현재 관점은 탐구하여 영화의 주제가 영화에 잘 녹아들었는지 그리고 어떤 화두를 던졌는지 알아볼 것이다.


본론


1) 영화로 보는 역사 그리고 차이점


- 영화의 전반적인 줄거리


영화의 첫 부분은 발리앙의 아내가 자살하여 수도사들이 그녀의 장례식을 치르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상심한 그는 대장간 일을 계속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내가 지옥에 갔을 것이라고 모욕하는 그의 동생을 죽이게 된다. 그는 살인자가 된 자기 자신과 자살한 아내의 구원을 찾아 아버지를 쫓아 십자군 전쟁에 동참하게 된다. 그렇게 길을 가던 도중 살인자인 자신을 쫓는 그 지방의 영주인 주교의 군대와 마찰을 빚어 결국 아버지는 중상을 입게 된다. 중상을 입은 아버지는 이탈리아에 도착한 후 불의를 행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정한 뜻에 따라 선을 행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아들에게 이벨린의 영주 자리를 물려준 뒤 세상에 떠난다. 이벨린의 영주가 된 발리앙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4세와 만나게 된다. 그로부터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말과 비슷한 뉘앙스의 말인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올바른 일을 하라는 말을 듣고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교인과 공존하며 살고 있는 자신의 영지 이벨린으로 가서 이벨린을 그들과 함께 개척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도 잠시 예루살렘 왕궁 내부에서는 기와 레이놀드를 주축으로 한 주전파와 무슬림간의 협정을 중시하자는 협정파가 서로 싸우고 보두앵 4세는 이를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레이놀드와 그의 기사단이 무슬림들을 학살하는 일이 일어나고 예루살렘군과 무슬림군은 서로 전쟁을 벌일 위기에 처하게 되지만 보두앵 4세와 살라딘과의 극적인 협정 성사 덕분에 전쟁은 막을 수 있었다. 보두앵 4세는 주전파를 몰아내기 위해 발리앙에게 기를 죽이고 발리앙과 동침 관계를 가졌던 시빌라와 결혼해 정국을 장악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발리앙은 올바름을 행하라는 왕의 말을 들어 왕의 명령을 거절한다. 결국, 보두앵 4세는 죽고 기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기는 성밖에서 싸우면 물이 부족해 패배한다는 발리앙의 말을 무시하고 무슬림간의 무리한 전쟁을 하다가 병사를 전부 잃고 포로로 잡히게 되고 발리앙은 백성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결국 살라딘의 군대가 오자 그들은 예루살렘 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그래서 발리앙은 살라딘과 협상을 하게 되고 발리앙은 모두의 생존권과 귀환권을 보장해주겠다는 살라딘의 말을 듣고 성밖으로 나와 귀환하게 된다. 이때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모든 것이기도 한다는 작품 전체의 주제를 관통하는 대사를 하고 발리앙과 헤어진다. 영화는 발리앙이 프랑스로 돌아오고 나서 제3차 십자군 전쟁에 나가는 사자왕 리처드와 만나는 장면을 보여주고 끝난다.


- 십자군 전쟁의 대의와 무슬림과의 공존 그리고 구원과 천국


영화의 줄거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영화의 키워드는 십자군 전쟁, 구원, 올바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너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면 너와 자살한 부인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발리앙과 그의 일행이 구호기사단에게 치료를 받을 때 이교도를 죽이는 것은 천국으로 가는 것이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러한 이념에 따라 레이놀드는 무슬림을 죽여 셀주크 튀르크와의 분쟁을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이교도든 죄인이든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는 현대 사회의 도덕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보인다. 과연 실제 중세인들도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여 이교도를 죽이는 것을 천국으로 가는 방법이자 올바른 것으로 여겼을까?


원래 그리스도교는 폭력을 배척하는 종교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고 말하는 성경 구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로마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인정받고 국가의 공식 종교가 된 이후에는 그리스도교는 폭력에 대한 견해를 바꾸어야만 하였다. 교회가 국가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국가가 때때로 싸우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교회는 비기독교인들과 싸울 것을 독려했으며 이는 실로 훌륭한 전쟁의 대의였다



이러한 대의를 내걸고 1095년 10월 교황 우르바노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무슬림의 지배 아래에서 고통받는 기독교인의 상황을 전하면서 성지 탈환을 신의 명령으로 포장하여 선포했다.


이러한 선언은 감정적이었으며 수많은 군중이 이에 따라 천국에 가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성지 탈환 전쟁에 참여하였다


예컨대 폭력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지만


교회가 국가의 지원을 받는 상황 속에서 교회는 비기독교인들과 죄인에 대한 전쟁을 성전이라며 정당화시켰고 중세 사람들도 이에 부화뇌동하여 전쟁에 참가하였고 이교도에 대한 전쟁을 천국에 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주연들의 행동을 통해 비판한다. 고프리는 이교도를 죽이는 것도 살인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고프리의 생각에 영향을 받은 발리앙은 자신과 시비가 붙은 무슬림 노예를 죽이지 않고 살려준다.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의 이벨린의 영주가 된 이후로 그곳에 있는 유대교인과 무슬림인들과 같이 이벨린을 개척한다. 이러한 행동은 영화 내적으로나 실제 역사적인 배경에서나 혁신적인 것이었다. 당시 십자군 세력은 기독교 왕국 내부의 무슬림 토착민들을 전부 내쫓을 수 없어서 공존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과 전면적인 문화적 접변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행동을 통해 발리앙은 깨닫는다


구원은 십자군 전쟁과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계급이나 종교적 신념과 같은 세상적 기준을 넘어 서로가 다 같이 공존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말이다



또한 영화는 십자군 전쟁의 진짜 목적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당시 구원을 요청한 동로마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유럽의 군사력을 빌려 아나톨리아 지방을 평정하고자 하였고 기독교세계는 이를 기회로 지중해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순수한 것이 아닌 이러한 계산적인 목적은 영화에서 왕의 친위대장이 우리는 땅과 재물을 위해 이 전쟁을 했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비판된다


서로와 공존하지 않고 땅과 재물을 위해 서로 싸우는 것은 허무하다는 것을 말이다



- 주전파와 협정파의 대립 그리고 공존과 평화


구원을 위한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는 영화 내에서 묘사된 무슬림 간 전쟁을 주장하는 주전파와 전쟁을 하지 말자고 한 무슬림과의 협정을 지키자고 주장하는 협정파의 대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차 십자군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십자군에 의한 무슬림 학살은 존재했고 실제로 예루살렘 내부에서 기와 레지몬드가 이끄는 주전파와 협정파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영화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주전파는 단순히 호전적인 전쟁광이 아니었고 협정파 또한 이상적인 평화주의자들이 아니었다. 당시 중동 지방은 종교적 문제만이 아니라 이권 문제도 존재하고 있었다.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은 지중해 무역의 핵심 지역이자 지정학적인 요충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내의 세력 충돌 또한 종교 문제만으로 인한 충돌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각종 이해관계로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충돌에는 이슬람 세력도 나서서 경쟁 세력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게다가 이슬람 세력도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셀주크 튀르크 제국으로 하나로 통합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력으로 쪼개져 있었다. 정리하자면 예루살렘 내부의 세력들과 이슬람 세력들이 각종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동맹도 맺고 대립도 해가면서 대치한 것이지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카톨릭과 이슬람 세력이 이슬람 대 카톨릭 이상 대 현실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대치한 것이 아니란 것이다. 기와 레지몬드 또한 영화에서 표현된 것처럼 무슬림에게 잔인하고 호전적인 전쟁광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위에서 설명한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한 측면이 더 컸다.



영화는 그러한 역사의 다양성을 오히려 묵살하고 우리에게 무슬림 간의 공존과 평화가 중요하다는 말을 한다


생각해보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유가 있든 전쟁을 하면 사람이 죽고 다치기에 그것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영화상에서도 주전파가 주도한 무슬림 학살 때문에 셀주크 튀르크와 전쟁이 일어났고 그 때문에 수많은 십자군이 죽었다


십자군의 시신을 까마귀가 파먹는 장면은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하려는 감독의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 예루살렘 공성전과 협력 그리고 생명의 소중함


십자군이 패하고 기 드 뤼지용은 포로로 잡혔다. 영화에서 발리앙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있는 병사들을 규합하고 적과 싸운다. 그들은 잘 싸웠지만, 숫자의 열세 때문에 결국 예루살렘 성을 그들에게 주고 백성을 살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영화에서 각색된 측면이 크다. 이슬람 군과 잔존 예루살렘 군이 치열하게 싸우고 예루살렘 군이 카톨릭인들의 해방을 조건으로 항복한 것은 맞지만, 발리앙이 일반민들에게 사기 진작을 위해 기사 작위를 수여하고 성지 예루살렘은 모두의 것이고 우리는 돌덩이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 싸운다는 말을 한 것 그리고 서로 평화롭게 싸움을 멈춘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우선 중세는 신분제가 있는 사회였고 혈통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된 시기였다. 용맹하다고 해서 무조건 기사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지 예루살렘은 카톨릭교, 유대교, 이슬람교 이 세 종교가 중요한 성지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일반 평신도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위의 발리앙의 연설에 백성들이 감동받은 것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것의 근거이다. 마지막으로 이슬람군과 예루살렘군의 협정은 이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발리앙의 성 안의 모든 주민들을 죽이고 예루살렘을 부수어 버리겠다고 한 자결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


영화에서 이렇게 각색한 이유는 무엇인가? 인류는 지능이 생긴 후부터 신, 돈, 국가 같은 허구를 만들어냈다


당연히 성지 예루살렘이라는 개념도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한 허구를 만들어 냄으로써 인류는 서로 대규모로 협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허구 때문에 서로 싸우기도 한다 그리고 서로 증오하고 서로 죽인다 영화에서도 성지 예루살렘을 두고 서로 싸우고 죽인다 그러나 허구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그 무엇도 인간의 생명 위에 있을 수 없다


발리앙은 예루살렘은 돌덩이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돌덩이를 두고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모두에게 기사 작위를 준다


계급을 초월하여 서로는 서로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허구는 인간을 위한 것이며 그것 때문에 죽을 이유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 중세 기사 서임과 기사도 정신 그리고 올바름


영화에서는 서로에 대한 공존 이외에도 구원에 대한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바로 기사도에서 나타난 올바름에 대한 것이다. 11~12세기에는 단일한 기사 계급도 없었고 기사도라는 단일한 행동 기준이나 규범도 없었다.


단지 기사서임은 후대에 갈수록 물질적 의미에서 종교적 상징적 의미로 변화해 갔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점을 이용해 기사도를 재해석하였다. 고프리가 발리앙에게 칼을 주고 빰을 때린 것은 대체로 그 당시의 기사 서임의 양식을 나타낸 것이지만


이후 고프리가 발리앙에게 용기 있게 선을 행하라고 말한 것은 당시 확립되지 않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약자를 지키라는 기사도를 영화 나름의 방식으로 재정립한 것이다


그것은 이후 보두앵 4세가 하나님 앞에서는 그때 당시는 어쩔 수 없었다 등의 합리화는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에서 재확립된다


발리앙은 그의 말에 따라 보두앵 4세의 기 드 뤼지용을 죽이고 발리앙과 통정을 한 기의 아내 시빌라와 결혼해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아 정세를 안정시키라는 명령을 거부한다 시빌라는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지 못한다며 발리앙을 비난했지만 발리앙은 그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라며 거부한다


영화는 발리앙의 행동을 통해 말한다 목적을 위해 수단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비단 발리앙의 경우만이 아니라 성지탈환을 목적으로 한 십자군 전쟁에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 역사적 사실관계와 주제의식


영화는 역사의 주제의식을 부각하고 주인공의 서사를 위해 사실관계를 각색하기도 했다. 우선 발리앙은 이벨린의 영주 고프리의 서자가 아니라 이벨린의 정통 영주였다. 그렇다면 고프리는 누구인가? 고프리는 작중에서 창작된 인물이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 발리앙은 대장장이었던 적도 없으며 귀족의 서자도 아니었다. 이태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를 타다가 난파된 적은 더더욱 없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사자왕 리처드 1세가 제3차 십자군 전쟁을 위해 프랑크 왕국을 거쳐 가다가 발리앙을 만나지만 리처드 1세는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갔으므로 발리앙과 만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영화 전체의 서사를 위해서 이러한 각색은 필요했다


계급과 종교의 공존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발리앙은 서자여야만 했다


그리고 리처드 1세와 만나 나는 대장장이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발리앙이 위에서 말한 일들을 겪고 돌아와 진정한 구원을 찾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상징이자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수미상관 구조를 완성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영화적 장치이다



- 역사의 다양성과 역사적 사실 그리고 영화의 주제


이러한 것들을 보다 보면 킹덤 오브 헤븐이라는 영화는 서론에서 말한 대로 큰 것에서 작은 것에까지 자잘한 부분에 있어서 역사적인 오류가 존재한다. 감독이 이런 것을 몰랐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모르지 않았다면 왜 역사적 오류를 범했을까? 그것은 본론에서 말한 대로 감독이 공존과 평화 그리고 갈등의 해소라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대주제를 부각시키고 그것을 위한 극적인 연출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결과였다. 그것은 이해할 지라도 이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존재한다. 나도 감독이 당시 복잡한 정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을 이분법적으로만 보여 주고 반동 인물을 평면적으로 그려냈다는 것에 반감을 가진다. 이것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역사를 다방면으로 보는 데에 큰 장애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다양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계급과 계층 그리고 이념을 뛰어넘는 공존과 평화라는 대주제를 부각시킨 것은 내 생각에는 옳은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공존과 평화라는 가치는 21세기 종교와 지역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는 현 시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공존과 평화의 가치를 깨닫고 그것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 시작한다면 그만한 수확이 또 없다. 그 점을 고려한다면 역사의 다양성과 영화의 핍진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영화의 주제를 부각하는 것은 일약 옳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역사의 다양성과 영화의 주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고려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모든 것을 다 잡으려고 하다가 영화의 주제가 모호해진다면 그것만큼 손해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론


1)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 그리고 나


영화는 중세시대 있었던 종교와 종교의 그리고 문화와 문화의 충돌인 십자군 전쟁을 통해 우리에게 공존과 평화 그리고 평등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발리앙이 신분의 고하와 종교의 차이를 개의치 않고 사람들과 함께 이벨린을 건설하고 올바름을 추구한 것처럼 발리앙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서로 합심해서 살라딘과 맞서 싸운 것처럼 종교적 대의보다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면 영화가 말한 대로 곧 그것은 구원이 될 것이다. 마지막에 살라딘은 예루살렘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우리의 성지 예루살렘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그곳에서 함께 공존하며 살아간다면 예루살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나는 돈, 학벌, 종교, 정치사상 등의 세상의 잣대와 상관없이 올바름을 향해 함께 공존하여 살아가면 우리의 세상은 진정한 천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논문: 홍용진,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 공존과 공생의 논리에 대한 역사적 탐구, 이주사학회, 2015

홍용진, 침략과 이주: 제1차 십자군과 예루살렘 왕국, 이민민족 연구회, 2014

안상준,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 – 십자군과 예루살렘에 관한 무슬림의 인식, 안동대학교, 2016

유희수, 크레티엥 드 트루아의 로망에 나타난 기사서임, 고려대학교 사학과, 2014

책: 존 허스트,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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