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호한체제 성립과 그 과정

by 이엘

개요


일찍이 학계에서는 농경민족인 한족이 서북방에서 생활한 유목민족인 호족을 흡수하여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한화론이 득세했다. 사실 문화 융합이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섞이면서 제 3의 문화가 생기는 것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이 같은 편향은 중국 제일론 그리고 본문에서 말할 한족의 폐쇄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연구(주로 박한제 교수의 연구)를 통해 점점 한족과 호족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수나라와 당나라가 탄생했다는 호한체제 이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박한제 교수의 연구에서는 폐쇄적인 한족이 후한 시대 유목민들의 침략을 받은 이후 호인과 한인이 섞이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위진 남북조 분열 시대에 호인들이 한인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폐쇄적인 한인 사회와 충돌하고 융합하는 과정 속에서 중화의 개념이 바깥쪽까지 확장되었고 이러한 기조를 당나라가 이어받아 세계적인 제국이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호한 체제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그 과정과 호한체제의 결과가 어떻게 후대에까지 전해졌는지 박한제 교수의 연구에 기반하여 설명할 것이다.


본문


1. 한당시기 중화사상의 변모


한 대의 중화사상이란 화이를 구분하는 폐쇄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 대의 중화는 한족 출신의 중원을 정복한 통일 왕조에게 인정되었다. 한족이 아니었던 호족들은 중화의 개념을 희석시켜 유덕자라면 모두 중화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고 이는 서진 계승의식을 가졌던 북위 효문제가 호족의 정체성을 버리고 적극적인 한화 정책을 추진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서위 북주가 호족과 한족을 동일한 정체성으로 묶어내려고 했던 계기도 되었다. 그래서 한인과 달리 북주를 계승한 당인은 한인과 비한인을 묶는 세계시민의 의미를 가진 단어가 되었다.


2. 정치적인 측면


호한 간의 수도 분리나 무관은 호인 문관은 한인 출신을 임명하는 독특한 인재 등용 제도 같은 호한 분리 정책을 내세웠던 동위 북제와 달리 서위 북주는 호한의 대등한 융합을 정책적으로 실시하였다. 북위 효문제 당시 효문제는 호족들에게 강제적으로 한족의 성을 쓰라고 강제했다.


그러나 그런 효문제와 달리 우문태는 호성을 다시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한족과 호족을 결집시키기 위해 한족과 호족 모두에게 호족의 성을 부여하여 같은 친족 집단으로 묶고 사성(임금이 신하에게 성을 주는 것)된 사람들에게 군직을 주어 부병제 안으로 편제하였다. 이는 호족이 친족이 아닌 부족 사회에 애착을 가져 성씨를 바꾸는 것에 별 거리낌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주례에 입각한 관료제도를 정비하였다. 이 같은 정책은 관롱 집단이라는 호한 합작의 정치 집단의 탄생에 기여하였으며 이 관롱 집단은 수 당 왕조의 성립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였다. 즉 호한 융합 제도가 새로운 중화성을 창출해내는 데에 기여한 것이다.


3. 문화적 측면


박한제 교수의 연구에서는 목란시의 시대적 배경이 여자가 가사와 병사를 책임지기도 했던 병호제가 시행되던 시기인 북위라고 생각했다. 즉 유연과 북위와 싸우는 과정에서 여자도 군대에 들어가서 이민족과 싸웠던 것이다. 북조의 묘정 문화와 남조의 묘정 문화가 합치되기도 했다. 남북조 시기에는 시신과 함께 시신명을 매장하고 그 주변에 식목을 심는 문화가 발전했는데 이는 묘지를 보이는 한족의 문화와 매장하여 그 묘지를 보이지 않게 하는 호족의 문화가 융합된 것이다. 북조는 가짜 묘지를 만들거나 흔적을 지우는 경향이 강했고 남조는 석각을 세워 묘지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또한, 도성을 지을 때도 호한체제의 영향이 미쳤다. 북위와 당의 성은 특이한 구조였다. 보통 농경민족의 성이란 것은 내성에 궁성과 관청이 있고 외성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있지만, 호족 지도층은 성 바깥에 거주하고 성안에 한족 주민들을 방이라는 구획으로 나누어 거주시킨 것이다.


4. 수나라와 당나라


남북조 때 성립된 호한체제를 계승한 수나라와 당나라는 대외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외국인과 무역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을 넘어서 당나라 때는 신라와 발해를 비롯한 외국인 유학생들이 빈공과에 합격하여 당 관료가 되거나 국자감에 입학하여 학문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당의 문화를 자국에 전수하기도 하였다. 법을 만들어 백성들을 계도하였으며 훈고학이 발달하는 등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측면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통치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고구려를 침략하는 등 유목민족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결론


이민족과 결부된 중국 역사를 보면 이민족이 주축이 된 통일 왕조가 중원에 세워지면 한족의 반발을 막기 위해서 한인의 문화를 수용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중화사상의 범위를 넓히는 등 타 문화에 대한 개방성을 넓히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조는 후대에 중국에 자리잡았던, 요, 금, 원, 청 등 이민족 통일 왕조에 이어졌다.


반면에 한족이 주축이 된 한족 통일 왕조나 정권이 자리잡으면 순혈주의를 내세워 폐쇄성과 억압성을 보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한족이 주도적으로 호족의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한화론이 어느 정도는 맞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불어 이민족 왕조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자는 주장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준다. 이민족 왕조는 앞서 말했듯 어느 정도의 독자성과 개방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문화란 어느 한쪽만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라는 걸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김석우, 문화의 융합과 호한체제론 - 박한제, 『중국중세 호한체제의 정치적 전개』(서울, 일조각, 2019); 『중국중세 호한체제의 사회적 전개』(서울, 일조각, 2019); 『중국 도성 건설과 입지 – 수당 장안성의 출현 전야』(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중국 중세도성과 호한체제』(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역사학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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