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개혁은 실패한 개혁인가?

by 이엘

고종황제가 일본의 간섭을 피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 이후로 1년 뒤 고종황제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이어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자주국가의 기초를 닦아야겠다고 생각한 고종은 나라의 이름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참조한다는 정책개념인 구본신참을 바탕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광무개혁을 실시했다. 광무개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고종은 대한국 국제를 반포해 절대왕권의 근거를 만들었고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천명하였다. 행정적으로는 23부를 한성부 13도 체제로 바꾸고 내각을 의정부로 개편하였다. 또한, 나라의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해 양전사업을 벌여 전 국토의 3분의 2 정도의 토지를 측량하였고 백동화를 주조해서 돈으로 세금을 거두었다. 대한제국은 전통적인 농업 뿐만이 아니라 공업과 운수업 등 근대 산업을 육성하는 식산흥업정책을 펼쳐 나라의 경제를 키우려 하였다. 자주국가체제를 보존하고 황제권을 옹호하기 위해서 군사력도 키웠다. 외국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하여 수도에 친위대를 설치하고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해 국가와 정권의 안보를 도모하려 하였다. 이런 국가 차원 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일상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한성 거리에는 전등과 전차 그리고 근대적인 상점 등이 세워졌으며 철도가 만들어지고 우편 제도가 개편되어 전 국토가 연결이 되었다. 그리고 도량형이 통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광무개혁은 결과적으로 역사가들에게 의도는 좋았지만, 결국에는 실패한 정책이라고 평가받는다. 왜냐하면 광무개혁은 내외부 상황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시작된 개혁이고 광무개혁을 이끌어가는 주체도 근대적 개혁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대한국 국제는 백성들의 권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종은 독립협회를 무력으로 해산하여 백성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대한제국은 근대적 화폐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재원이 없었다. 그리고 산업적 측면에서도 대한제국은 근대적 경제체제와 근대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 대한제국의 산업 발전은 외세에 대부분을 의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자주국가를 천명했지만, 실상은 외세의 이권 각축장 신세였다. 외세에 이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기껏 키운 군대도 2만명 남짓이어서 외세의 침략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모든 분야에서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광무개혁은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제대로된 성과를 거두진 못했고 결국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

민지가 되고 말았다.


광무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광무개혁의 모토였던 구본신참 때문이다. 구본신참은 옛것을 근본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서양 기술과 문물은 근본적으로 서양식 사상을 기본으로 한다. 예컨대 시계는 근대 자유주의와 연관이 있다. 사람들이 시계를 가지게 됨으로써 개인이 시간을 관리하게 되었고 그렇게 됨으로서 기존에 시간을 알려주었던 신관과 교회의 권력이 개인에게로 이전되게 된 원리인 것이다. 고종이 고수하려 했던 것은 중앙 왕권이 절대 권력을 가지는 황권주의 그것은 개인이 권리를 가지는 시대와 역행했기 때문에 반발을 샀고 그래서 황권주의에 기반을 둔 광무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성공시키려면 과거의 습관을 버려야 할 때도 있다. 고종의 광무개혁은 이를 잘 말해준다. 변화를 위해서는 구습을 구본을 버려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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