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정의

by 이엘

1894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은 청나라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그로 인해 일본은 요동 반도와 타이완 섬 할양 그리고 2억 냥의 막대한 양의 배상금을 받아낸다. 하지만 러시아는 극동 반도의 정세 안정을 위해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게 돌려주라고 일본을 압박했으며 일본은 그에 응하게 된다. 조선의 왕과 왕후는 이를 일본을 물리칠 수 있는 긍정적 신호라 보았다. 그래서 왕후 중심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배척하는 인아거일 정책을 펼쳤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러시아에게 뺏길 것이라 우려하고 인아거일 정책의 중심자인 왕후를 죽이는 것을 계획한다. 즉 을미사변의 시초인 것이다.


1895년 10월 8일 국치일 일본 공사관의 공사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한 여우 사냥(명성황후 시해작전명)이 이루어진다. 미우라 고로는 미리 대원군을 포섭해 두었으며 일본 교관이 훈련시킨 훈련대를 해산시킨다는 명목으로 훈련대 장교들을 미리 포섭해 두었다. 그렇게 대원군과 훈련대를 꼭두각시로 삼은 그들은 ‘여우’인 왕후를 시해하기 위해 조선 왕궁의 시위대를 제압하고 그 대장인 홍계훈을 죽인다. 그들은 건청궁녕 앞으로 가서 궁녀들을 구타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왕후를 보호하려던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죽이고 왕후를 시해한다. 그들은 궁녀와 왕후의 시신을 불태우고 땅에 파묻는다. 역사상 유례없는 범죄의 시작과 끝이었다.


사건 이후 미우라 고로는 왕의 부름을 받는 형태로 입궐했다. 그리고 미우라에 의해 친일 내각이 세워졌다. 왕후는 빈으로 강등되었고 미우라 고로는 각국 공사들에게 이번 사건은 일본 공사관하고는 아무련 관련이 없고 대원군과 훈련대가 격분하여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건이 비화되고 대원군과 훈련대는 그저 방패막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사건이 전세계적으로 비판을 받자 일본 정부는 각 인원을 자국으로 소환한다. 인원 중에는 한성순보사 사장 전 농상공무 차관 그리고 일본 도쿄대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이들은 대륙침략론자들이었다. 어쨌든 한국 정부는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재판권조차 가질 수 없었다.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가해국이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히로시마 법정에 그들이 소환된 후 나는 사건의 담당 검사가 되었다. 윗선에서 이런 중차대한 사건에 초임 검사를 배치한 이유는 불보듯 뻔했다. 사건을 묻으라는 것이겠지.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다.


나는 유럽에서 유학하면서 인종 차별을 겪었다. 그리고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참상 또한 들었다. 그렇기에 이 사건을 두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일본이 내 조국이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인륜을 저버린 길을 가는 것을


사건 1차 공판 당일 나는 사건의 피고인들을 심문했다.


사건의 피고인들은 자신들은 건청궁녕 앞까지밖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나는 조선 궁궐의 궁녀와 내시의 증언을 바탕으로 피고인들이 대원군과 훈련대를 앞세워서 왕후가 있는 건청궁 안까지 갔음을 주장했다. 그러자 피고의 변호인이 말했다.


“조선 궁궐의 사용인들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습니다. 그자들은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고 일본에 불리한 증언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허술한 변론이었다. 아무래도 이 재판이 쉽게 끝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조선 궁궐의 사용인들이 반일 감정을 갖고 있다는 객관적인 증거도 없고 일본에 불리한 증언을 할 객관적인 증거도 없었다. 그저 주관적인 입장 뿐이었다. 하긴 이 재판 자체가 요식행위이니 어쩔 수 없지 난 그 요식행위의 허점을 찌르기로 했다.


나는 그자에게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그럼 고종의 비서관인 사바틴이란 자가 말한 증언도 신빙성이 없습니까? 그자는 서양인인데요? 사바틴이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피고측 변호인은 아무말도 못했다. 사전에 조사한 바론 그는 조선인은 반일감정이 높다고 생각하는 보수 우익이다. 하지만 나는 서양인의 증언을 댐으로써 그의 주장에 허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공판은 일단 끝났다. 상부는 아무래도 나를 단단히 찍은 모양이었다. 별것 아닌 일로 질책을 받고 온갖 잡범죄 사건들이 나에게로 배정되었다.


나에 대한 압박은 내부에서만 있지 않았다. 외부에도 있었다. 공판이 언론 보도되자 나를 비국민이라 성토하는 여론이 줄을 이었다. 시민들도 내편이 아니었다. 이렇게 고독한 싸움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외눈박이 나라에서는 두 눈 달린 사람이 비정상인 법이다.


새 국면이 도래했다. 1895년 조선에 의병이 일어난 것이다. 단발령을 주도했던 수령들이 목이 잘리고 있었다. 관영 민영 언론 전부 이 의병의 배후가 조선 국왕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반조선 감정이 가득한 현 일본의 상황에서는 피고인들이 무죄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나는 공판에 새로운 국면을 주기로 결정했다. 미우라 뒤에 누가 있었는지 밝혀내는 것이다.


나는 조선 주재 일본 공사관에 서신을 보내어 공사관 기록 전문을 확인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미우라 고로 이전에 일본 정계의 실력자인 이노우에 가오루가 부임했던 것이다.


더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왕후와 합작해서 친일 인사인 박영효를 실각시켰고 미우라 고로가 부임하고도 20일간을 그와 같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노우에 가오루는 대륙침략론자였다.


2번째 공판


나는 미우라 고로에게 이노우에 가오루와 왜 20일간 같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말했다.


“그건 그냥 형식적인 조언이었습니다. 검사님 인수인계 과정이 좀 길어진 것뿐이었습니다.”


난 그 말에 비웃듯 말했다.


“그래요? 인수인계를 20일간 하는 사람은 처음 봤군요. 하지만 나는 공사관으로 있던 이노우에 가오루씨의 기록 전문을 봤습니다. 이노우에 가오루씨는 왕후와 협력해 친일 인사인 박영효를 실각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일본국에 반조선 여론이 들끓었었지요. 왜 친일 인사인 박영효를 조선 내각에서 내쫓느냐고요. 저도 그때 일본에 있었기에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그 뒤 당신이 일본 공사관으로 부임했지요. 그리고 시해사건을 벌였고요. 그럼 묻겠습니다. 이노우에 가오루 씨는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까?”


사건의 변호인은 내 말을 듣고 다급히 소리쳤다.


“일본 내 반조선 여론이 들끓은 것과 미우라 씨가 공사로 부임한 건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물증이 없잖습니까?”


나는 그 말에 단호히 대답했다.


“물증은 있습니다. 이 공사관 수기 전문에 ‘미우라 당신이 직접’ 일본 내 반조선 여론과 야마가타 아라토모 육군 대신의 추천 덕분에 이곳에 부임할 수 있었다고 말을 했더군요? 당신과 이노우에 가오루씨의 그 비밀스런 20일간 내용은 없어서 이노우에 가오루씨가 시해 사건과 관련 있다는 확증은 없지만 이노우에 씨가 만든 판 덕분에 당신이 조선 왕후 시해사건을 주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명백해졌군요.”


나는 이 사건을 법정에서 입증하려고 온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실체를 알리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 예상대로 방청객은 술렁거렸다. 이노우에가 모든 것을 계획한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렸다. 판사는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술렁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2차 공판이 끝난 후 나는 상관에게 불려갔다. 당연히 상관은 화를 내었다.


“애국자들에게 그 무슨 실례인가!!”


나는 단답식으로 말했다.


“왜 그들이 애국자입니까 그들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이고 시체 유기범입니다.”


내 상관은 불같이 분노했다.


“뭐? 민비를 죽인 건 애국이야! 민비는 탐오했고 그 결과는 동학란이었어 조선이 그렇게 약화되면 러시아가 조선을 침범할 거고 그렇게 되면 청과 일본도 러시아에게 먹히게 돼! 결국 민비는 조선의 죄인이고 일본의 죄인이고 더 나아가 동양의 죄인이야!!”


나는 말했다.


“그런 민비를 심판하는 건 조선 법과 조선 백성이여야지 우리의 총칼이 아닙니다. 그리고… 민비 하나를 죽이자고 그 조선 궁궐의 수많은 죄없는 사람을 죽였단 말입니까? 그것이야말로 고개 들 수 없는 죄 아닙니까?!”


난 그에게 아니 일본 제국에게 일갈했다.


3차 공판


재판정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왜냐하면 조선에 춘생문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춘생문 사건 미국 선교사들과 일부 조선의 시위대 장교들이 조선 국왕을 미국 공사관으로 도피시키려다 조선의 군부대신 어윤중에게 발각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도 조선의 내정에 간섭한다는 여론이 퍼졌고 그 여론은 이 재판에 불리하게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이 없었다.


판사는 말했다.


“미국도 조선 내정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음이 이 춘생문 사건을 통해 드러났다. 따라서 본 재판부는 애국자들에게 전원 무죄를 선고한다.”


정치가 재판에 개입을 하다니 말도 되지 않았다. 살인범들이 애국자들에게 칭송을 받고 정의는 부러졌다. 하지만 나는 할 말을 할 것이다.


나는 본 재판부에 소리쳤다.


“이따위로 할 거면 재판이 무슨 의미가 있어! 차라리 총과 대포가 유일한 법이라고 말해! 이건 위선에 불과해!!”


곧 나는 총칼을 든 군인들에게 끌려나갔다.


나는 이후 검사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명패를 만든 장인이 나에게 물었다.


“변호사님 당신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말했다.


“후세 다쓰지입니다.”






후일담



1926년 3월 25일


천황 일가를 살해하려 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 사형이 내려졌다.


재판부는 물었다.


“피고인 마지막으로 할 말 있습니까?”


나는 박열과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의 할 말을 내가 대신 하였다.


박열은 천황 일가를 살해할 목적으로 폭탄을 구했습니다. 그것은 엄연한 죄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을 학살한 일본인에 대해서는 왜 사형 판결을 내리시지 않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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