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로마트 생선코너에 뉘어있는 동태 눈깔로 반복되는 매일을 심드렁하게 견뎌내다 거친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느낌, 낯선 환경에 놓이는 생경한 경험을 통해 오감이 깨어나고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낯선 이들 낯선 자신과의 마주침 같은 것은, 꼭 여행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잔금을 치르고 이전 세입자의 현관 비번을 받아 적었다. 둥지를 떠나 찾은 첫 번째 보금자리에서 나는 매일매일 온갖 종류의 마주침을 경험하고 있다. 이를테면 곰팡이와 벌레, 화장실 배수구 냄새, 왼쪽으로 5도 정도 기울어진 거실 천장 같은 것들 말이다.
집주인은 2년 전 대대적인 수리를 감행했다. 노후화의 흔적을 지운 대가로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요구했음에도 타깃은 적중했다. 빌라나 오피스텔보다는 구축이라도 아파트를 원하는 사람, 그렇다고 부서져가는 문짝처럼 연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기를 바라는 사람. 나는 32살답지 않은 깔끔한 내부에 반해 신속하게 전세계약을 했다.
베란다에서 올망졸망한 화분과 채소, 할 수만 있다면 고구마나 토마토를 키우는 것, 리틀포레스트 혜원이처럼 삼시세끼 꼬박꼬박 손수 잘 챙겨 먹는 것, 과감한 색감으로 감각적인 화장실을 꾸미는 것 등등은 나의 로망이었다.
곰팡이 낀 베란다 창틀과 화장실 배수구 냄새, 쌀벌레인지 날벌레인지 한두 마리씩 까꿍하고 인사하는 아침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게다가 32살의 호호 할머니 아파트는 2년 전 올수리 리모델링을 뚫고 여기저기 노후화의 흔적을 여실히 드러냈다.
현실과 로망의 간극. 그 사이에서 씩씩 거라며 분노하거나 회피하며 안 본 눈 삽니다로 어정쩡하게 서성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꽤 바지런하고 전투적인 나를 만났다.
쉴 틈 없이 택배가 도착했다. 화장실 배수구 냄새를 잡기 위해 뚫린 구멍을 막고 새로운 향을 덮었다. 샤워 시를 제외하고는 하수구 구멍을 실리콘 덮개로 막고, 세면대 물 넘침 구멍도 막고, 넓적하고 팝업이 가능한 물마개로 교체해 외출 시에는 구멍을 막아두었다. 신비의 돌이라는 천연화공석을 여기저기 배치해 매일 편백오일을 뿌려준다.
주방과 현관에 출몰하는 쌀벌레인지 날벌레를 없애기 위해 설거지 머신이 되었다. 밥그릇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귀신같이 벌레가 나타났다. 녀석들이 극혐 하는 향이기를 바라며 편백오일로 온 집안을 뒤덮었다.
근데 천장은 대체 왜 기울어졌을까.? 역시나 노후화라는 답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부동산 아주머니와 계약하기 전 2번이나 왔었는데 그때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거실에 샤랄라커튼이 설치되어 있어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천장아 너 몇 년은 더 버틸 수 있는 거 맞지? 무너지지만 마라.. 제발.
신속하게 노란색 체크무늬 커튼과 압축봉을, 그 외에도 각종 가림막을 시도 때도 없이 구매했다. 중문이 없어 현관 앞 가림막을 설치했고, 옷방 창문은 제주감성 바다 프린팅을, 화장실 샤워부스 칸막이는 외국 어느 바닷가 프린팅을 걸어주었다.
곰팡이 제거제를 뿌려가며 베란다 시커먼 공간을 하얗게 바꿨고 청소를 하기 시작하니 온갖 것들이 거슬려, 어느 날은 조금 낡은 화장실 문틀을 하얗게 칠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조만간 주방 쪽에 설치된 낡디 낡은 정온식 화재감지기도 교체해 볼 예정이다.
전셋집인데 뭘 이렇게까지 하냐며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집 샀으면 진짜 볼만했겠다.' 그렇다. 나는 정말 열정적으로 집안을 단장하기 시작했다. 본가에 살 때는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던 것들이 내 집이다 생각하니(물론 24개월 한정이지만) 뭐 하나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백만 원 가까이 구매한 이케아가 도착한 후 쉴 틈 없이 조립을 했다. 주말에 김밥씨가 오기로 했지만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가로 2미터 세로 60cm의 책상을 나 홀로 조립하고 나니 손가락과 어깨에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게다가 독립을 하고 난 이후 수시로 배가 고프다. 왜 이렇게 냉장고를 꽉꽉 채우냐며 엄마에게 잔소리했던 지난날을 반성했다. 뭘 몰랐다. 자고로 냉장고는 먹을거리로 가득가득 쌓여야 제맛이다. 어서 장 보러 가자.
1인가구에게 온갖 종류의 선택과 결정, 오만가지의 가사 노동은 당연지사 독박이다. 직접 겪어보니 누구를 탓하거나 기댈 수 없어 때때로 좀 바보 같아지는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온전히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느낌에 뿌듯하고 가끔은 내가 좀 기특해지기도 하다면, 나름 꽤 괜찮은 나날들 아닐까
지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