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s bae Aug 08. 2024

철옹성이 그렇게 튼튼합니까?



(기정) 나는 무리 지어 다니는 여자들보다 4인 가족이 더 꼴 보기 싫어, 아우 그 철옹성!


(친구) 우리도 가족에서 나왔는데.


(기정) 야, 우린 식구들끼리 절대 안 돌아다니지! 미쳤냐? 집구석에서 보는 것도 징그러운데  .. 우리가 꾸리는 집구석도 우리가 나온 집구석이랑 똑같을까?


(친구) 똑같아 똑같아. 근데 그걸 또 하고 싶어 해. 이 미련 곰탱이 같은 인간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9화 중에서 -  






대한민국 철옹성 4인가구에서 나고 자랐다. 채식주의자에 가깝던 엄마는 임신과 함께 고기사랑에 빠졌고 덕분에 배는 남산만큼 부풀었다. 입덧이 심했던 첫째는 너무 달라 엄마는 내가 사내아이 일 줄 거의 확신했다고 한다. 사내아이. 엄마는 처음부터 딸내미를 잘못 알아봤다.



8,90년대는 산아제한정책과 남아선호사상이 뒤섞여 성비불균형을 촉발한 시기다. 나는 대한민국의 인구 통계를 들먹인다. 1990년생의 성비불균형은 여자 100명당 남자 116.5명으로, 전례 없는 최고점을 차지하고 있다. 12지신 동물 중 호랑이, 용, 말띠 여자는 팔자가 세다는 속설 또한 성비불균형에 한몫했다. 



그래서 뭐? 넌 90년생 말띠도 아니잖아? 어흥~ 엄마의  반기를 잠재우고 세상 잘난 여자인척 개똥철학을 펼쳐다. 성비불균형으로 내 또래 연하 남자들이 차고 넘친다고, 그러니 정 외로우면 중년에 결혼해도 된다고. Ok? 이 모든 건 결혼과 출산, 4인가구가 이상향인 엄마로부터 쏟아지는 잔소리 폭격을 막아내기 위해 최근 신규 개발한 나의 방패막이다. (90년생 남성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엄마는 2,3일에 한번 꼴로 전화를 걸어온다. 삼겹살 구울 건데, 올래? 갈치조림 했는데, 먹을래? 그럴 때마다 나는 쪼르르 달려. 그러다 남의 집 자식 결혼 얘기, 돈 얘기, 퇴 얘기에 입 다물고 조용히 먹을 것이지, 꼭 이런저런 토를 달아 엄마의 심기를 건드린다.



어릴 적부터 나는 왜? 라는 질문을 입에 달고 살았고, 양말을 뒤집듯 뭐든 분해하고 뜯어보길 좋아했다. 엄마는 왜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돈은 정말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야? 왜 퇴사하면 안 되는 건데? 엄마 아빠처럼 평생 한직장만 다니는 게 최고라는 거야? 블라블라 블라블라.



6살 조카였다면 귀엽기라도  텐데. 마흔이 코앞인 딸내미가 들이미는 질문들에 엄마는 줬던 밥그릇을 뺏고 싶은 표정이다. 이 험난한 세상사에 가족과 돈만큼 너를 든든히 보호해 줄 수 있는 것도 없다, 네가 뭐 그렇게 특별히 잘난 줄 아냐, 남들처럼 평범한 것이 좋다, 결혼도 하고 새끼도 만들어야지 노후에 외롭지 않고 편안한 거다.(돈 이야기는 차고 넘쳐 다음화에.)    



베이비부머 세대인 엄마는 8남매, 10인 가구 속에서 내 밥그릇 하나 지키기도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고, 20대 중반의 나이에 결혼과 출산, 시집살이와 분가, 단칸방과 아파트, 가정주부과 워킹맘으로 60여 년을 눈물콧물 쏙 빼며 진득한 서사로 가득 채웠다. 그렇게 쌓아 올린 인생 최고의 가치는 '가족과 돈'이며, 형제 중 그 누구도 이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엄마의 은근한 자부심이다.



속 한번 안 썩인 모범생 큰딸은 어느 날 산도적 같은 놈을 데려오더니 두 딸을 연이어 출산하며 어느새 4인가구를 만들었다. 문제는 이제 갓 시작한 나의 독립생활. 엄마 눈에는 '결혼 전까지의 임시거처' 혹은 '결혼 못한 불완전하고 부족한 인간'으로 비칠 뿐이다.



나는 엄마의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릴 제간이 없다. 하지만 묻고 싶다. '철옹성이 그렇게 튼튼합니까?'



그럴듯한 외형이 든든한 내구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껍데기에 치중하고 싶지 않다. 얼굴을 아는 이는 늘어가지만, 그중에 마음을 나누고 싶은 이가 얼마나 되는가?


음이 통하는 사람, 마음이 동하는 영화와 음악, 마음을 춤추게 하는 모든 것들,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그 편이 조금 더  믿음직스럽고 든든한 기분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