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밥 한번 먹자, 진짜
"다음에 올 때는 꼭 술을 많이 사 올게"
아쉬운 헤어짐의 시간이 다가오면 나는 문밖으로 멤버들을 배웅한다. 다들 너무 즐거웠다며, 다음에 다시 보자는 작별 인사를 나누며 헤어진다. 우리는 다시 만날 확률이 드물다.
"여기 자주 올게. 회사가 가까워서, 맨날 올 수도 있어."
보낸 적 없는 초대장에 RSVP를 회신주는 사람도 있다. 본인의 직장이나 집이 내 사무실과 가깝다고, 자주 오겠다며 너스레를 떤다. 물론, 다시 온 사람은 없다.
하루에 대여섯 명에게 빈말을 던지고 나면, 방금 내가 한 말이 진심인지 빈말인지 나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빈말을 티가 나게 해야 잘하는 것일까?
상대방이 빈말하는지 진심인지 알아챌 방법이 있을까?
그날은 유독 분위기가 좋던 날이었다. 모인 멤버들 간의 케미도 좋았고, 술도 넉넉했으며 농담과 웃음이 끊기지 않았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지만 아무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결국 해가 뜨고 나서야 다들 첫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술을 먹던 와중 그녀가 이 멤버로 다음주에 다시 모이자는 말을 꺼냈다. 술기운이 잔뜩 오른 모두가 그래, 그래를 외쳤고 순식간에 장소와 날짜가 정해졌다. 모임에서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는 일은 매우 드문데, 단톡방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모두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던 내가 단톡방을 만들려고 핸드폰을 손에 드는 순간, 옆에 앉은 그가 단톡방은 막상 만들어도 며칠 못가니 만들지 말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나는 그 순간 다음 주 모임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그날, 아침에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잘 지냈냐고, 오늘 다들 모이는 거냐고. 화장실에서 샤워할 준비를 하다가 문자를 확인한 나는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모임 후 일주일, 오늘 올 거지? 라며 갑작스럽게 연락하기도 애매한 시점이었다. 물론 나도 약속은 잊은 채 다른 일정이 잡혀있는 상황이었다.
머쓱함을 무릅쓰고 문자로, 카톡으로 그날 모임에 왔던 사람들에게 참여 여부를 확인했다. 한 명은 참여 희망, 나머지는 불참이었다. 나만 빈약속으로 넘긴 게 아니구나 싶어 안도감이 살짝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에게 얼른 답문으로 오늘은 다들 모이기 힘들 것 같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녀에게 알겠다는 짤막한 답변이 왔고, 나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하는 약속들은 그 자리에서 기분이 좋아서 해대는 빈말인 경우가 많다. 이것을 방지하거나 구분하는 방법은 사실 아직 확실히 모르겠다. 그때는 진심이었지만 서로 눈치 게임을 하다가 어그러지는 경우도 있다. 보통 나만 진심일 수 있는 상황에 방어적으로, 혹은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기 싫은 마음에 술자리의 모든 말을 빈말로 넘겨버리곤 한다. 그녀처럼 문자를 하지 않은 채 흘려보낸 마음들도 많았을 것 같다. 이제는 모든 빈말을 진심으로 받아보려고 한다. 내가 빈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빈말과 진심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진심이었다. 강남역에서 택시를 잡기란 요즘 들어 부쩍 힘들어졌고, 다들 1시간씩은 기본으로 각오하고 기다려야 한다. 모임이 끝나고 난 후 나는 뒷정리도 해야 하고, 술에 잔뜩 취한 상태가 아니라면 남은 일을 처리하고 내일 업무 계획을 정리한 후에 퇴근한다. 모임 시간 동안 처리하지 못한 업무를 처리하는 데 약 2-3시간 정도가 걸린다.
밖에서 마냥 택시가 잡히기를 기다리는 것은 힘드니까, 보통 안에서 기다리다가 택시가 잡히면 나가라고 한다. 아직 손님이 나가지 않은 상태에서는 뒷정리를 본격적으로 하기도 조금 민망하다. 다들 지켜보면서 무언가를 도와주려고 하는데, 알다시피 정리란 그냥 혼자 말없이 빨리 휙휙 하는 게 편하다. 그냥 옆에 앉아서 택시를 잡는 걸 함께 보면서 말동무를 해주곤 하는데, 여기서부터 애매해진다.
그는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른 사람이 모두 나간 후에도 택시가 잡히지 않는다며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어플을 켜서 한번 띡 눌러보더니 안 잡히네, 그러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간다. 모임이 끝난 후 두 시간이 지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혼자 앉혀두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그는 도와주겠다며 쓰레기를 정리하더니 정리가 모두 끝난 후에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뒷정리가 모두 끝나고 피곤해진 나는 이제 슬슬 가자며 운을 떼었다. 그는 택시가 잡히지 않는다며 어플을 다시 내 눈앞에 갖다대었다.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 속으로만 욕을 하며 웃음을 지었다. 모임이 끝난 지 세 시간이 지난 새벽이었다. 그는 미안하다면서 밖에 같이 나가서 기다리자고 했다. 나는 집에 걸어갈 것이라, 그럼 나는 먼저 갈 테니 밖에서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럼 자기가 함께 걸어서 집에 데려다준다고 한다. 역시나, 본론은 이거였다.
나는 웃었고, 됐다고 기다려줄 테니 택시나 잡으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절대로 같이 나갈 마음이 없었다. 내가 집으로 걸어가는 순간 어떤 핑계로든 따라올 게 분명했다. 그를 문밖으로 내보낸 후 집에 가야한다. 나는 그에게 술 한 잔을 더 권했다. 딱 보니 그는 아까부터 술기운이 올라온 상태였고, 나는 뒷정리 하는 새에 술이 다 깨버렸다. 여기서 몇 잔만 마셔도 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5분 내로 두 잔을 마시고 나니 그의 안색이 파죽으로 변했고 나는 승기를 잡았다. 이 시간에는 택시가 안 잡힐 리 없다며 그의 핸드폰을 받아 택시를 불렀다. 잡혔다! 드디어 집에 갈 수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한 명이 아니다. 택시가 안 잡힌다는 핑계로 뒷정리 한 후가 마치 2차인 마냥 집에 가지 않으려는 시도가 자주 일어났고, 나는 이제 빈말을 '티 나게' 하는 법을 터득했다. 일단 모두들 일어날 때 문 앞까지 배웅한 후, 작별 인사로 끝을 흐리며 하는 것이다. 아이구 택시 그냥 여기서 기다리지.... 잘 들어가!
빈말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가장 헷갈린다. 오픈 세션으로 매주 열어두는 모임 특성 상, 오고 안 오고는 나의 선택이 아닌 일방적인 그들의 선택이다. 물론, 감사하게도 한 달 정도는 매진이 되어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건 빨라도 한 달 후다.
거의 모든 참여 멤버가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로 작별 인사를 하곤 하는데, 실제로 계속 오시는 분들이 있다. 첫 단골 멤버인 그녀는 첫 모임 이후 무려 4주 치를 연달아서 예약해놓았는데, 이게 막상 또 계속 만나게 되니 조금 또 부담스러워졌다. 매주 재탕하던 나의 단골 메뉴도 그녀가 오는 날에는 똑같은 것을 내기 싫어서 다른 메뉴를 생각해야 했고, 이미 그녀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던 터라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는 빈도수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사적인 연락도 모임 전후로 잦아지기 시작했는데,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그녀가 참가비를 내고 놀러 온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따로 만나서 놀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일정을 맞추기도 어려웠고 단둘이 만나자니 또 이게 애매했다. 더듬더듬 연락하다가 엇갈리다가 하는 날들이 이어졌고, 그녀가 야근하게 되어서 모임에 오지 못한 날 이후로 우리는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빈말이 상호 진심이라고 해도 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 충분하지 않은 진심은 애매함을 남기고, 애매함은 관계를 흐린다. 빈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그 정도로 관계를 이어 나가겠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상대방을 계속해서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거나, 서로의 일부분을 공유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우리의 관계는 어느 방향으로든 나아갈 수 있다.
빈말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구분할 수 없도록 포장해서 내보내는 것이 빈말이니까.
작별 인사를 하면서 "앞으로 서로 만날 일은 없겠다. 안녕"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빈말을 그대로 놔두느냐, 진심으로 바꾸느냐는 받은 사람의 몫인 것 같다.
그냥 내가 진심으로 받으면 된다.
그렇게 받다 보면 쟤한테는 빈말하면 안 돼, 라면서 알아서 걸러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