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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든라이언 Oct 16. 2023

4. 희대의 발명, 화두(話頭) 참선

나란히 걷는 선불교

과학기술의 발명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체와 감각기관의 능력을 확장]


하는 데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더욱 멀리 보고 기억하기 위해 렌즈와 카메라가,

보다 더 잘 듣기 위해 마이크와 스피커가,

보다 멀리 있는 상대방과 대화하기 위해 발명된 전화기에 도입된 후,

보다 더 많은 다수와의 정보교환을 위해 인터넷과  결합해 현대의 핸드폰으로 발전했습니다.

수많은 앱의 다양한 기능으로 말미암아 스마트폰은 이제 우리들의 제3의 감각기관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무차별적 확장과 한 방향으로만 치닫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지구환경의 파괴, 첨단의 전쟁부터 교통사고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사고로 이어지는 부작용을 수반하지만, 분자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지구 밖 먼 우주까지 진출하기 위한 욕망의 전차는 더욱더 가속하며 내달리고 있습니다.


물론, 밝은 미래를 위해서는 서로를 함께 이롭게 하는 과학기술 발전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 저희와 같은 과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하겠지만 여전히  [오펜하이머의 모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안타까운 현실 위에 서있습니다. 특히, 최첨단 기술이 '무기'와 결합하면 어떻게 되는지 러-우 및 이-팔 전쟁의 참상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와 남을 모두 함께 이롭게 하고자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이 절실히 요구되는 요즘입니다.


반면, 불교는 어떻게 하면 끝없이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본질적인 핵심 사상이 퇴보하지 않고 또 물들지 않으면서도 현대인의 마음에 혹은 미래의 참나를 찾아 여정을 떠나는 이들을 위해 메시지를 잘 남길 것인가 고민하면서 변화해 왔습니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과는 정반대로 오감과 의식을 포함한 제6식 너머보다 근본적인 우리의 본 성품에 오로지 초점을 맞추고 말이죠.


불법의 정수(精髓)로 불리는 [선(禪)]은 그 독특한 계승법으로 인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2567년 (2023년 기준)이나 지났음에도 아직도 그 명맥이 현재 한국의 땅에 머무르며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만, 사실상 형이상학적 철학과 형이하학적인 변화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강력한 메커니즘이 수행 결과물로 분명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화두를 참구(參究)한 끝에 자신의 성품을 바로 보아 즉시 깨달음을 얻게 하는 [간화선(話禪) 혹은 활구참선(活句參禪) 법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치 중첩되고 얽히며 발생하는 양자역학 이론처럼 상호 영향을 미치는 생각의 파도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가운데 이를 역이용하여 다시 생각이 일어나는 근본 자성으로 즉시 되돌아가게 하는 멋진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1.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가는 방식은 한 곳의 매듭을 풀어가는 과정 중에 다른 곳에서 여러 매듭들이 얽히는 상황이 발생해서 결국 풀어나가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즉, 한 생각을 일으키고 후회, 반성 및 참회를 하는 동안 다른 생각들이 다시 일어나서 새로운 상황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다음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그 수가 얼마나 될까요?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불리는 경전에는 말 그대로 생각으로 일으킬 수 있는 팔만 사천 가지의 번뇌를 다스리는 법문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노력에는 점차 가 있어 점점 나아지겠지만 얽히고설킨 팔만 사천 가지의 실타래를 풀어내자면 결국 백 년도 채 안 되는 일생을 바치는 정도로 이룰 수 있는 성취는 매우 미미할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삼아 승지 겁(三阿僧祇劫)의 수행을 통해 정각을 이루었다는 것은 결코 과장된 것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깨닫기 이전의 생각의 상태는 오해와 착각으로 만들어 낸 허망한 것들의 연속이기에, 새로이 올라오는 수많은 생각들의 실타래들이 만들어 내기 시작하는 아주 작은 미세한 매듭들마저 생길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는 방법은 뭘까요?


바로, 매듭을 풀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바로 한꺼번에 태워버리는 것일 것입니다. 어떻게?


2. 일단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무념이 중요하다고 해서 생각 그 자체를 끊어 없애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별 소득 없이 윤회 유전에 따라 다음 생으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흔히, 아주 높은 도력을 가진 분만 보일 수 있는 열반상 즉, 앉거나 선 자리에서 몸을 벗어나는 좌탈입망(坐脫立亡)에 대해서도 선종에서는 마음에 고향에 완전히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난 그러한 이벤트는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사가 없음을 알아 체득하는 경지에는 이르렀지만 완전히 이치에 맞는 수준에 이른 것이 아니라면  그저 영혼 혹은 법신이 육체와 분리되는 하나의 기술을 획득한 것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작용조차도 이럴진대 극단의 상황에 다다라 자살을 통해 이 육체를 벗어난 것으로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저 실타래를 더욱 엉키게 할 뿐 안타깝고 슬프지만 다음 생의 고통을 더욱 가중할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화두 참선은 과거에 일어난,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모든 생각들을 [한 생각]으로 모아 그 힘이 지속되어 다른 생각들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 즉 소위 일념삼매(一念三昧) 혹은 부동일념(不動一念)에 도달하는 것을 중요한 중간 지표로 삼고 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일념이 만들어 내는 에너지는 얼마나 대단할까요? 마치 불 붙이는 심지 딱  하나만을 남기고 모든 생각이 하나의 폭탄으로 일체화되는 것 바로 이 상태가 실타래를 한꺼번에 태워버릴 준비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생각을 끊어내지 않으면서도 근본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향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기발하고 기막힌 마음 장치가 개발된 것입니다.


정말 [희유(希有), 드물고 귀함] 한 것입니다.


그러면, 화두의 속성이 뭘까요? 흔히 말하는 선문답 즉 알쏭달쏭한 질문들로 가득한 질문과 답들. 어떤 분들은 현대적이지 않아 현실적일 것 같지 않은 이 방식이 너무 올드한 패션인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고 또 너도 답을 모르고 나도 답을 모르는 이런 문제에 집착하는 것이 옳은지 궁금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편엔 화두의 시작점과 그  의미를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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