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부처님들의 게송에 [마음은 본래 없으며, 마음의 본성이 공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에 대하여,
1. [화엄경 華嚴經] ‘보살설게품(菩薩設偈品)’에는
[만약 어떤 이가 있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보라.
일체가 오직 마음에서 지은 것이다. (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
라고 하며, 마음의 절대적인 근본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 또, 화두공안 (話頭公案, 선종(禪宗)의 조사들이 만들어 낸 선문답 모음) 집으로 잘 알려진 무문관(無門關)의 30칙에서,
제자인 대매법상(大梅法常) 스님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묻자, 마조(馬祖) 스님은 “마음이 곧 부처다 (즉심시불, 卽心是佛)”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참고로,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는 중국 육조혜능(六祖慧能) 선사의 제자 남악 회양(南嶽懷讓) 스님의 뒤를 잇는 제 조사인데, 달마 대사의 스승인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가 예언하였듯 마조선사의 지도하에 84분의 도인 제자를 배출한 선종 역사상 가장 뛰어난 조사 중의 한 분으로 추앙받는 분입니다.
3. 그리고, [금강경 金剛經]에는 부처님께서 보살들에게 마음의 본성이 비어있다고 하는 대신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내어라 (無所住 而生其心, 응무소주 이생기심)]고 하셨고,
4. 또 한, 불설관무량수경(佛說觀無量壽經)에도 [이 마음이 부처가 되고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
라고 설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본래 공하고 실상 없는 것인가, 아니면 실상이 있는 모든 것의 근본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의 저로서는 이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 할 수 없습니다. 마치 그곳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멀리 떠나온지 무척 오래되어 작은 기억조차 나지 않은 먼 고국땅의 얘기를 듣는 느낌이랄까요...그저, 모두 마음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제각기 다른 상황과 상태를 이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다만, 3번 금강경의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내어라"는 구절은 우리나라 불교 조계종의 시조인 중국 육조혜능 선사가 두 차례에 걸쳐 완전한 깨달음으로 이르게 했다고 전해지는 만큼 조금 더 깊게 들어가보겠습니다.
일단, 마지막 구절 마음을 내어라 (生其心)은 마음에서 무엇인가가 일르킨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작용' 혹은 '쓰임'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혜능선사가 이 구절을 접하기 전에는 본 성품에 거의 다다른 경지까지 스스로 도달 했지만 어떤 경계에 걸려 마음을 쓰는데 자유자재하진 못한 상황이었음을 추정 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어떻게에 해당하는 [머무르지 않는]인데, 머무르고 머무르지 않는 것 또한 움직임이 있는 무엇인가를 지칭 한 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의 게송처럼 텅 비어 있건 본래청정한 실상의 것이든 가장 근본적인 '마음'자리는 청정하여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인가가 바로 [생각 念]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마음(Mind, 心)은 생각, 감정, 욕구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만, 불교에서는 앞서 서술한 것처럼 '마음'이 단순히 감정이나 생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모든 방법을 포괄합니다.
반면, 생각 (Thoughts, 순우리말이며 한자의 念 : 생각 념, 생각 염 , 思 : 생각 사 想 : 생각 상 考 :생각할 고등등에 해당함)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작용이며 우리가 경험하거나 상상하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의식적인 인지 과정을 뜻합니다.
그래서 흔히 마음과 생각을 [바다 와 파도]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바다 위 바람이 불면 그 강도에 따라 파도가 일렁이듯이, 감각기관을 갖추고 있는 몸과 몸 안팎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인식 과 의식'이 마음으로부터[생각]의 파도를 만들어 내어 움직입니다.
문제는, 이 생각이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이 다양한 속도와 방향으로 제각기 다른 형태로 불어오면 파도의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이듯이 '인식 과 의식'이 반복되고 서로 얽히거나 반대로 혹은 같은 방향으로 나타나면 [생각]은 자연스럽게 시공간적으로 매우 복잡한 형태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더욱 큰 문제를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복잡한 생각들이 어떤 상황이나 대상에 대해 자연의 이치를 바르게 볼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결국 크고 작은 오해들이 점차 누적되면서 흔히 괴로움의 3가지 속성이라고 부르는 집착,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을 형성하게 되고 다시 점점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들어 낸 생각의 파도는 끊임없이 생멸하며 거짓 그물처럼 얽혀서 본래의 청정한 바다로 되돌아가는 길을 스스로 막고 있다] 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명상이라고 하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일어나는 생각을 관찰한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 '인식과 의식'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생겨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멈추고 싶은 생각]과 [관찰하고자 하는 생각]이 또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생각이 끊어진다고 해도 본래의 성품을 볼 수는 없고 다른 생으로 넘어가는 윤회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단지 생각을 멈추고자 하는 노력으로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고통에서 벗어난 대자유를 되찾을 수 없습니다.
[...중략…. 그러나, 지나간 생각(前念)과 지금의 생각(今念)과 다음의 생각(後念)이 생각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法身)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 중략…. 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서 생각을 모두 제거하지 말라.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 남(生)을 받게 되느니라.]
- 육조단경(六祖壇經) 無念 (생각이 없음) 편-
결국,
본래 청정한 자성으로 되돌아가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낼 수 있는 존재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이 [생각]이라는 파도를 버리지 않고
잘 다스리는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을지,
스스로 생각해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