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처음 만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왔다.
모스크바로 돌아갔던 그녀가 돌아왔다.
학기 중인데 무려 3주나 시간을 냈다.
교수를 설득하고 시간표를 조정했단다.
한국에서는 꿈도 못 꿀 스케줄이다.
지난여름에도,
이번 가을에도 그녀가 나를 찾았다.
대학생이라 비행기 티켓이 비쌀 만도 하데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출혈(?)이 심했다.
지난여름 그녀를 데리고 산으로 바다로
놀러 다니며 많은 돈을 썼다.
한국까지 찾아온 그녀이기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
문제는 내 월급이 박봉이란 거다.
두 달을 흥청망청 쓰니 구멍이 송송 뚫리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지난여름처럼 지낼 수 없다 했다.
그녀는 오히려 내게 미안하단다.
그런 뜻은 아닌데...
그녀에게 체크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걸로 우리 데이트 비용을 하자.
대신 네가 관리해.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누군가에게 카드를 맡기는 건
러시아에서도 드문 일인가 보다.
믿어주어 고맙다며 알뜰살뜰하게 쓰겠단다.
그녀를 데리고 내 고향을 찾았다.
저녁 내내 김밥을 말아 도시락통에 담았다.
김밥 싸는 게 이리 힘들 줄이야...
재료며 정성이며
그냥 사 먹는 게 훨씬 낫다.
그래도 함께라 즐겁다.
자전거를 빌려 가을길을 달렸다.
시골 마을에서 자라 아는 이도 적다.
그저 그녀와 내 추억을 공유하고 싶었다.
함께 싼 김밥을 먹었다.
놀러 온 할머님들이 아가씨 예쁘다며 칭찬해 주신다.
그녀와 함께 한 가을은 일상 그 자체다.
어딜 여행하고 놀러 가기보다 일상을 함께했다.
퇴근 후 공원을 걷고 카페를 찾았다.
주말은 사우나 데이트,
서울 나들이, 영화관 등을 찾았다.
지출이 주니 뚫렸던 구멍이 메워져 간다.
약간의 여력이 생겼다.
그녀가 모스크바로 돌아갈 때 즈음
이미지 하나를 보여주었다.
올 겨울 모스크바로 향하는 티켓이다.
직항은 비싸 환승 티켓으로 구했다.
카자흐스탄 알마티를 경유하는 비행기다.
그녀는 뛸 뜻 기뻐한다.
드디어 모스크바에서 나를 만날 수 있다며 좋아라 한다.
다가올 겨울,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2주다.
직장인에게 2주는 꿈만 같은 숫자다.
모아둔 연차를 모두 소진해야 한다.
팀장과 팀원들을 설득해야 한다.
일이 적은 비수기를 골라야 한다.
난관이 많지만 일단 지르고 봤다.
날짜를 확정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녀가 두 번이나 찾아와 주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올 겨울 나는 모스크바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