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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우리의 모스크바

by 일용직 큐레이터

그 겨울 난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열몇 시간을 날아간다.

카자흐스탄 알마티를 경유해 모스크바로 도착하는 비행기다.


나를 위해 두 번이나 한국을 찾아준 그녀다.

바쁜 직장인이지만 정말 어렵게 2주의 시간을 냈다.

이렇게 길게 쉬어본 건 처음이다.


팀장과 팀원을 어렵게 설득했다.

열심히 일했으니 다녀오라고 했다.

정말 다행이다.


기내식은 그저 그랬다.

몇 년 전 조지아, 아르메이나를 가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환승한 적이 있다.

당시 러시아 국영 항공사 아에로플롯을 탔다.


이번에는 에어 아스타나를 탔다.

예약 과정에서 뭘 잘 못했는지 인도식 베지터리안 기내식이 골라졌다.

공항에서 이걸 바꾸느라 직원과 한참을 씨름했다.


알마티 공항은 작았다.

면세점도 얼마 없고 식당과 카페도 몇 개 없다.


고기만 잔뜩 든 카자흐스탄식 만두를 시켰다.

어찌나 느끼한지 맥주를 들이켜도 느글함이 남아 있다.

직원의 도움으로 와이파이를 잡아 그녀에게 연락했다.


알마티 공항은 현지 전화번호가 있어야 와이파이를 잡을 수 있다.


비행기가 설원을 난다.

춥기로 유명한 모스크바다.


사실 러시아에 별 관심 없다.

이번 여행이 크게 기대되지는 않는다.

단지 그녀를 만나고 싶을 뿐이다.


모스크바 세례메티에보 공항 직원은 불친절하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면서도 옆 직원과 수다 삼매경이다.

길게 늘어선 대기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 시간 넘게 대기 후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두 달만의 만남이다.

거리를 생각하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그녀와 얼싸안고 회포를 풀었다.

그녀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내 손을 잡고 여기저기 이끈다.


모스크바는 완연한 겨울이었다.

영하의 날씨지만 바람이 없어 추운지 몰랐다.

한국의 겨울이 칼바람이라면, 모스크바는 단지 기온만 낮을 뿐이다.

한국 겨울이 훨씬 춥고 아프다.


거리를 지나는 러시아인들이 신기하다.

가끔 나를 보며 니하오~라고 놀려대는 이들도 있다.

이제는 너무 익숙하다. 나도 니하오~라고 돌려준다.


러시아 대표음식이 뭘까?

사실 잘 모르겠다.

샤슬릭은 중앙아시아 음식이다.

보르시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등 주변국에서도 즐긴다.


모스크바에는 갖가지 레스토랑이 있다.

요즘에는 아시아 음식, 그중에서도 일식이 인기다.


러시아 카페는 한국과 다르다.

한국 카페는 음료디저트를 즐기는 곳이다.

반면 러시아 카페는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다.


한국 카페가 아기자기하고 예쁘다면

러시아 카페는 단조롭다.


러시아 직원들은 특이하다.

수시로 테이블을 확인하고 빈접시, 휴지 등을 정리한다.


계산은 테이블에서 해야 한다.

직원이 우리를 바라봐줄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저기요~하고 부르면 매너가 아니라고 한다.


러시아를 여행하려면 거주지 등록을 해야 한다.

호텔을 잡으면 알아서 해준다.

우리는 에어비앤비를 택해 직접 해야 했다.


이 거주지 등록 절차가 가관이다.

먼저 근처 관공소로 가 신청서를 작성한다.

결과가 나오려면 1주일 정도 걸린다.

그전까지 예비 등록증을 휴대해야 한다.


2주 여행하는데, 1주가 걸리는 거주지 등록이라니...

그녀가 이끄는 대로 신청서를 작성했다.

1주일 후 등록증을 받으려 찾았지만 아직...이었다.


직원의 실수로 신청서가 접수되지 않았다.

그녀는 차갑게 화를 내며 직원을 몰아세웠다.

윗선급에서 달려와 급하게 등록증을 내주었다.


러시아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오늘도 하나 배운다.


그녀를 따라 모스크바 이곳저곳을 누볐다.

동물원, 발레, 아르바트 거리, 크렘린 등 안 가본 곳이 없다.

그녀는 재밌는 눈치지만 난 사실 별로다.


난 대도시보다 시골을 좋아한다.

사람 북적이는 곳보다 아름다운 자연을 좋아한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으니까...

2주는 빠르게 지나갔다.

벌써 헤어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울먹인다.

돌아갈 날을 이틀 앞두고 용기를 냈다.


너희 부모님을 만나고 싶어

그녀는 깜짝 놀랐다.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의미인지 아는 눈치다.


난 모스크바에 그냥 온 게 아니다.

결판을 내야 한다.

내일 나는 그녀의 부모님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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