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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현실 01화

너의 일상을 지켜줄게

by 일용직 큐레이터

기력이 쇠했다.

단단하던 무릎은 드득 소리가 나고,

유연했던 허리는 구부졌다.


타이핑을 치던 손은

얼룩 덜룩한 검버섯이 피었다.


하루 5시간 남짓 자며

주 7일 일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대출금, 생활비 쓰기에 빠듯하다.


러시아 갔던 와이프가 돌아왔다.

6개월 만에 만난 남편을 보고 눈물짓는다.


"여보,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불과 작년만 해도 탈 없이 잘살던 우리다.

7평 원룸에서 시작해,

13평 투룸으로 넓혔고,

마침내 30평 아파트로 이사 왔다.


새로운 도시,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사업을 꿈꿨다.


결과는 대실패.


변명의 여지없이 못난 내 잘못이다.

비행기 값이 없어 6개월간 와이프를

러시아에 묶어두었다.


할부로 겨우 마련한 비행기를 타고

와이프가 돌아왔다.

더 이상 아르바이트로 버틸 수 없다.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근처 공장을 찾았다.

50여 군데 넘게 지원했지만

딱 한 곳만 연락 왔다.


차로 1시간 떨어진 작은 공장이다.


"일할 생각 있으시면 면접 한번 오시죠."

까만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공장으로 향했다.

좁은 도로를 꽉 메운 트럭이 앞 길을 막는다.


젊은 사장은 반갑게 나를 맞는다.


"대학원까지 졸업하신 분이 왜 공장을..."

구구절절 설명하기 싫었다.

부산 이사 후 재취업이 안돼

공장일을 알아보고 있다 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젊은 사장은 공장 이곳저곳을 소개해 준다.

친절하다.

부산에 내려와 만난 사람 중 가장 살갑다.


그만큼 사람이 절실하단 의미다.

반대로 경력없는 나를 써야 할 정도로 일이 힘들다는 의미다.


면접 후 젊은 사장은 최저시급을 제안했다.

주간, 야간 교대근무인데 실수령액은 220만 원 남짓이다.


이게 현실인가?

사무직으로 일할 땐 팀의 리더로

나쁘지 않은 연봉을 받았다.


그 자리를 버리고 이사 왔는데

여기는 최저시급이다.


대답을 않차 젊은 사장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대학원 나오신 분에게 최저시급은 좀 그러니, 10% 더 드릴게요."

이것저것 다 떼면 240만 원 남짓이다.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불평했던 전 회사가 꿈인 것 같다.

금방 창업해 큰 돈 벌 것처럼 떠든 내가 원망스럽다.

날 믿어준 와이프 볼 낯이 없다.


11살 어린 와이프는 대학 졸업하자마자 시집왔다.

결혼하며 와이프에게 약속한 게 있다.


"너의 일상을 지켜줄게."

평범한 음식을 먹고,

카페를 가고,

데이트를 즐기는

일상을 지켜준다 약속했다.


와이프가 없던 6개월 간

먹지 않고, 사지 않으며

악착같이 일했다.


와이프에게 똑같은 삶을 요구할 수 없다.

예전과 같이 카페를 가고 레스토랑에 데려갔다.


와이프만은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

나 하나 믿고 수천 킬로 떨어진 이국에 살고 있는 그녀다.


평일에는 공장을 나가고,

주말에는 물류센터, 건설현장에서 일한다.


그럼 300만 원 남짓 번다.

겨우 버티고 있다.


이게 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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