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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쓰장 Apr 17. 2022

지고는 못 살아!

이겨도 별거 없더라

  내 자식은 내 맘대로 안돼!

  한 번쯤 아니 여러 번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자식이 태어나면 내 자식은 다 천재인 줄 안다. 

커가면서 점점 그 기대가 낮아지고 ‘그저 평범하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하며 기대를 내려놓게 되는가 보다. 자식이 태어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고, 최소한 부모보다는 더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자식을 위해서 기꺼이 슈퍼맨이 되어간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청소년기 사춘기를 겪으며 대학에 가고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을 시키고 독립한 후에도 여전히 캥거루처럼 주머니에 쏙 넣어 다니고 싶은 부모도 있을 것이다. 앉으나 서나 자식 걱정에 바람 잘 날 없는 부모의 마음을 자식들은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지금 이렇게 말하는 나 또한 자식인 입장에서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의 세대 형제들이 비슷하듯 모든 것이 부족한 형편에서 서로 다투면서도 무난하게 성장해 온 것 같다.   

   

  현재 자녀 세대는 형제자매가 외동이거나 두세 명이라 풍족하게 자라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모가 하지 못했던 것을 자식에게는 부족함 없이 다 베풀고 싶어 한다. 그런 까닭에 더 많은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되고, 부족함이 없는데 왜 노력을 안 할까?라고 서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나의 이야기고, 흔히 말하는 잔소리 많은 꼰대 세대의 변명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아들의 고등학생 시절 참석한 학부모 연수 시간에 교장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귀한 자식일수록 엄하게 키우라는 옛 가르침을 기억하고, 학생들이 기본 규칙을 잘 지킬 수 있도록 가정에서도 도와주셔야 합니다. 운동장에 나오면서도 실내화를 그대로 신고 다녀서 ‘학생, 신발로 갈아 신어야지!’ 했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교장 선생님, 저 고3인데요?'…."

  고3은 운동장에서 실내화를 신고 다녀도 된다는 말인가? 고3이니까 웬만한 행동은 모두 허용해달라는 의미일 것이다.

      

  집에 오면 교복을 방바닥에 그대로 벗어 던져두고 다음 날 그대로 입으면 되니 만지지 말라, 책상 위 책이 흩어진 채 쓰레기는 옆에 굴러다니고 방안에 발 디딜 틈이 없어서 부모가 일일이 치워주면 며칠 못 가서 제자리다. 책상 정리하라면 왼쪽에 있는 책을 오른쪽으로 살짝 옮기면 끝…. 부모가 지쳐서 내버려 두면 이젠 다른 방으로 옮겨서 또다시 반복!

  오로지 공부만을 위해서 기본생활 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부모의 허용도 반성할 일이다.    

 

  어휴, 결혼해서 자기 살림 나면 그때는 치우겠지!

   우리 아들딸은 이래도 좋으니 공부만 잘해다오! 금쪽같은 내 새끼!” 

   할 수만 있다면 대신 시험이라도 봐주고 싶은 마음은 부모라면 누구나 가져본 생각일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학교 시험이 뭐라고 밤 10시가 넘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들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수학 문제를 풀게 한다고 다음날 만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빨리 못 푼다고 답답해서 막대기로 내리친 식탁 유리가 박살이 났다. 그렇게 점점 금쪽같은 천재 아들은 보통 학생으로 나의 기대치를 낮추어 갔다.   

   

  그렇다면 새로운 희망! 둘째 딸은 어떠했을까? 초등학교 3학년 수학 시험지를 받아왔는데 45점이다. 기대치로 따지자면 ‘금쪽 은쪽 새끼’ 수준도 힘들었다. 다음날 다시 시험지를 흔들며 신나게 뛰어왔다.


  “엄마, 우리 선생님이 수학 시험지 채점을 잘못하셨대요.”

  “어머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딸 몇 점?”

  “50점이에요.”


  딸은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내 귀가 잠깐 쫑긋하다가 또 한 번 마음을 비워야만 했다.   


  

 내 자식은 내 맘대로 안돼, 그래도 지고는 못 살아!”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자식의 마음이 안타까운 것인가?

  아니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자식 때문에 부모의 마음이 억울한 것인가?    

 

  모든 분야에서 뛰어날 수는 없다. 공부 머리가 있는 자식도 있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자식도 있다. 꼭 공부 잘하는 사람이 특별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 또한 이렇다 할 공부 재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노력해서 겨우 여기까지 왔으면서 자식에게 더 힘든 강요를 하는 건 아니었을까? 분명 강요했을 것이다. 책을 많이 읽히고 어떤 재능이 있는지 관찰하면서 이끌어주는 태도가 더 바람직한데, 노력하는 모습을 칭찬하면서 “져도 괜찮아”라고 말해주어야 했다.

    

  뒤늦게나마 져도 괜찮다라는 믿음을 주었을 때 우리의 자식들은 달라졌다. 기대치를 낮춘 탓일까, 일종의 포기였을까? 어쩌면 신포도 비유처럼 자기 위안을 삼기 위한 회피 기제가 작동한 탓이었을까? 나의 마음도 서서히 여유를 찾게 되었다.      


 이겨도 좋지만 당당하게 지는 것도 멋진 일이야!     

 

(*신포도 비유 : ‘여우와 신포도'라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비유로 여우가 포도밭에 가서 포도를 따 먹으려고 하는데, 너무 높은 곳에 달려있어서 못 먹을 상황에 직면하자, 여우가 '저 포도는 신포도 일 거야'라고 따 먹는 것을 포기했다는 이야기)     


  어버이날, 결혼기념일, 생일날이면 아이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요구했다. 마음의 손 편지를 받고 싶다고!

  한 해 두 해 세월이 가면서 풍성해지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고 진심이 담긴 성장보고서가 쌓여갔다. 그리고 언제든지 꺼내 읽을 수 있도록 인터넷 세상 속에 우리 가족만의 SNS 소통 방을 만들어 추억의 기록물과 사진들을 함께 공유해 나갔다. 돌사진부터 졸업식, 생일, 입대 및 전역식, 취업 합격통지서, 가족 여행 흔적, 아이들의 편지 등 꼼꼼한 기록물의 가족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큰 위안을 가져오는지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일이라는 걸 경험한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기대치를 낮춘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은 성취감에도 함께 기뻐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대화거리가 수도 없이 늘어나게 된다.   

   

“아빠의 희망봉에게.

편지 너무나 잘 봤다. 대단한 놈들이구나.

아빠의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네.

너희들의 대견한 생각이 고맙고 감동이다.”    

 

“엄마의 덧붙임.

믿음직한 아들딸 덕에 내년에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게 생겼다.

자신의 목표를 찾아 열심히 하는 모습도 아름다운데

엄마 아빠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깊이 와닿아서 울컥했다.

오 메 ~ 눈 깜짝할 사이에 새해가 밝아부렀네!

예쁘게 아름답게 새해에도 너희 꿈들이 열매를 맺기를 기원 하마.”

 

< 2019년 기해년 새해의 기록! > 중에서.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다. 

 부모의 기대를 채우려고 고군분투하는 자식의 모습에서 행복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금쪽같은 내 새끼가 웃을 수 있도록 조금씩만 내려놓아 보자.

 결국은 나에게서 웃는 얼굴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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