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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수나무숲 Aug 23. 2023

향긋하고 새콤달콤하게

끝없는 더위 이겨내기



더워도 너무 더운 여름이다.

날씨가 덥고 여러모로 쾨쾨한 일상이 지속되니 향긋한 게 좋아졌다.

그래서 나는 루꼴라를 즐겨 먹는다.

루꼴라는 남편과의 첫 만남, 소개팅에서 ‘루꼴라 피자’를 주문한 남편에 의해 처음 먹어본 풀이었는데 아삭한 식감과 그 특유의 향이 생전 처음 맡아본 향이라 굉장히 새로웠다.

그리고 루꼴라를 보면 문득 소개팅에서

열심히 대화를 이끌어 나가려 애썼던

남편의 다정한 얼굴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진다.     


더운 날씨에는 불 앞에 오래 서 있기 싫으니 익히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샐러드류를 정말 많이 먹었다.

샐러드에 들어가는 풀 중에서는 루꼴라를 가장 좋아했던 나는 루꼴라를 한번 구매할 때 2팩 3팩씩 구매하게 됐다. 그런데 많이 먹을 것 같아서 미리 사서 쟁여두면 꼭 예상보다 덜 먹게 된다.

곧 있으면 시들시들해질 것 같은 루꼴라를 소진하고 싶은 마음에 발견한 레시피가 바로

‘참외 샐러드’다.

참외의 노란 색감과 간단한 레시피가 눈은 싱그럽게 하고 마음은 평안하게 만들었다.


6월에서 8월까지가 제철인 노란 에너지의 참외는 외할아버지가 좋아하셨던 과일이다.

그래서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참외를 보고 있으면 외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 나는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할아버지를 조금 자랑해 보자면

1929년생 그 시절 모던보이였다.

사진 속의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중절모를 쓰고 정장을 차려입은 상당한 멋쟁이셨고

동네에서 가장 예쁘다고 소문난 할머니를 쟁취하셨다.

당시 사람들의 평균키가 166cm라고 나와있는 통계를 생각하면

키가 176cm 이상인 할아버지는 심지어 지금의 남자들과 비교해 보아도 큰 키에 해당하는 훤칠한 체형을 가지셨다.


초등학교 때 친구랑 싸우고 속상해서 울면서 집에 들어가면 할아버지는 큰 두 팔로 나를 안아 달래 주셨다.

엄마가 일 때문에 집을 비울 때면 엄마대신 점심을 챙겨주셨는데 할아버지는 라면 한 개를 푹 끓여 라면 면발이 거의 우동 면처럼 불은 상태에서 딱 절반을 나에게 주고 나머지 반을 드셨다.

커가면서 나의 허벅지가 오동통해진 것을 보곤 다 할아버지가 먹인 라면 때문이라며

엄마는 라면을 많이 못 먹게 했지만 아주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라면을 반반 나눠 먹던 추억은 과거로 갈 수 있다면 꼭 가보고 싶은 시점일 만큼 그립다.     


할아버지는 늘 소식하셨지만 식후에는 꼭 배나 참외를 즐겨 드셨다.

참외를 먹을 때 속에 있는 씨를 다 긁어내고 먹는 사람도 있지만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나는 참외 속의 달콤하고 독특한 식감을 느낄 수 있는 씨 부분을 정말 좋아했다. 한 번은 아빠가 참외껍질을 벗긴 후 씨도 정성스레 다 긁어내서 나에게 먹인 적이 있는데 나는 속이 긁힌 참외를 보며 참외씨가 왜 없냐며 투정 부렸다고 한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참외의 하얀 과육보다 달콤한 씨 부분을 더 좋아한다.      

할아버지는 내가 한창 아나운서를 준비할 때 돌아가셨다.

이젠 밖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도 집에 들어와 목놓아 울지 않는 나이가 됐지만

만약 나를 달래줄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여전히 나는 어리광을 부렸을 것이다.     



잘 익은 참외의 달콤이 좋다.

노란 빛깔의 참외 속을 긁어내어 체망에 과즙만 걸러낸 후

레몬즙 2큰술, 올리브유 2큰술, 그리고 꿀, 소금, 후추를 조금 넣어 적당히 간을 하면

드레싱이 쉽게 만들어진다.

예쁘게 썰어둔 참외와 루꼴라가 놓여있는 접시에 골고루 부어주면

새콤달콤한 여름의 맛, 참외 샐러드가 완성된다.     

할아버지께 참외 샐러드를 만들어 드렸다면 어떤 반응이셨을까?

나는 이 새콤달콤한 맛이 좋지만,

할아버지는 그냥 참외를 먹는 게 더 맛있다고 하셨을 수도 있겠다.     

아침 식사로 혹은 회색빛이 도는 무료한 시간대에 참외의 노란 에너지를 입속에 넣어주면

새콤달콤한 맛이 내 몸에 기분 좋은 에너지를 전파한다.

달콤한 참외, 향긋한 루꼴라, 새콤한 레몬즙이 매우 조화롭다.     


이런 삶을 살고 싶다.

그리운 할아버지를 회상하고

떨렸던 첫 만남을 떠올릴 수 있는

쓴맛과 짠맛이 빠진 새콤달콤하고 향긋한 삶.     


이런 맛을 닮은 삶이라면 이 더 문제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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