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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수나무숲 Sep 21. 2023

비 오는 날엔 얽히고설키게!

단순한 바삭함.


비가 거세게 쏟아진다.

하늘에 마치 구멍이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집안에서 밖을 보는 이 시간의 내가 다행스럽다.     

어렸을 때는 하늘에서 물이 떨어진다는 것이 재밌었다.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아서 친구들과 비에 쫄딱 맞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친구들과 함께 비 맞으며 오는 하굣길은 놀이가 되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순간은 중학교1학년 중간고사 시험을 친 후 하굣길이었는데

같이 하교하는 친구 둘과 함께 비를 쫄딱 맞으며 뛰어서 집으로 갔던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시간은 약 25분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여느 학교와 마찬가지로 내가 다니는 중학교 역시 꽤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고 쭉 비탈지어진 계단을 내려와 터널을 건너서 신호등 2개를 건너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 몸뚱이 만한 가방을 우산 삼아 피를 피한다며 잔망스러운 발재간을 부리며 뛰다 보니 교복과 심지어 그날 시험 쳤던 과학시험지도 다 졌어서 정답확인을 할 때 꽤 애먹었다. 하지만 어리고 건강하고 체력이 좋아서 그런지 집에 가자마자 샤워하고 뽀송한 기분을 맞이하면 남은 시험에 대한 걱정, 지나간 시험에 대한걱정이 싹 날아간 듯했다. 그만큼 그때는 모든 것이 단순하고 쉬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30대 중반이 되자 비는 모든 것에 걸림돌이 되었다.

미리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비가 오는 날은 피해서 약속을 잡고.

비는 그저 집안에서 바깥에 비가 내리는 걸 보는 것 정도가 딱 기분 좋은 상황이 된다.

‘ 비 올 때 이사하면 더 잘 산다더라.’ 이런 위로는 비 때문에 일의 수고로움이 더 배가되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일지 사실일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이런 위로는 자주 한다.


야외 행사를 진행하는데 비가 너무 내려서 관계자와 참석자 모두가 피곤한 상황이라든지, 기업 광고에 출연했던 배우들의 인터뷰 날에 하필 비가 부슬부슬 내릴 때 어깨 한쪽이 비에 살짝 젖은 배우를 향해 ‘ 비가 오면 더 잘된대요! ’라는 말로 인터뷰 전 어색한 첫 말문을 텄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대기업 사내방송으로 입사하여 서울로 다시 이사 하 던 날 비가 내렸고

그곳에서 시작한 첫 방송촬영 때 역시 비가 내렸었다.

돌이켜보면 비가 와서 더 이사가 잘되고 촬영이 더 매끄럽진 않았지만 그 당시 ‘ 비가 오니 더 잘 될 거야...’라는 주문을 속으로 외운 것 같다.     


정장이 비에 졌고 스타킹 신은 구두 속으로 빗물이 들어올 때, 비를 맞아서 몸이 오들오들 떨릴 때는 속을 더 든든하게 채워주고 싶다.

비가 올 때면 대부분이 전과 막걸리를 떠올리는데 비가 내리는 소리가 지글지글 기름에 전이 부쳐지는 소리와 흡사해서 비 오는 날엔 특히 전을 더 찾게 되는 건 언제부터였을까?

어렸을 때는 ‘ 비가 오면 전을 부쳐야지’ 했던 어른들의 모습을 잘 이해 못 한 내가 자연스럽게 비 오는 날 전이 생각난다며 남편이 퇴근하기 전 반죽을 만들곤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전은 김치전.

그런데 김치전을 동그랗고 예쁘게 앞 뒤를 프라이팬으로 잘 뒤집으며 노릇노릇 부쳐내는 건 쉽지가 않았다.

비 오면 김치전을 먼저 만들던 나는 최근에 부추전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의외로 만들기도 훨씬 쉬웠다.     

부추를 잘 씻어 넣고 애호박을 채칼로 길게 길게 썰어서 같이 넣는다.

그리고 부침가루를 소량만 뿌리고 버무려주면 애호박에 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부추와 애호박이 자연스럽게 엉켜있다.

이 반죽을 달궈진 기름 팬에 무심하게 한 뭉터기로 툭 던져놓고 누르면 신기하게 전모영이 흐트러지지 않고 부추와 애호박이 잘 얽히고설켜 끈끈하게 지탱해 준다.

그래서 뒤집을 때도 훨씬 쉽다!  

게다가 부침가루는 부추와 애호박을 이어주는 끈끈한 풀 정도의 역할이라 아주 소량 들어가서 정말 순수하게 부추와 애호박을 온전히 먹는 건강식이 된다.

레시피를 보면 건새우도 반죽할 때 함께 넣으라고 하지만 내 경험상 부추와 애호박 만으로도 충분하다.      

얇고 바삭하게 부쳐진 부추전,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추 애호박 전은 남편이 정말 잘 먹는다. 얇고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아 포만감이 덜해서인지 둘이 같이 먹으면 4장 정도는 기본으로 뚝딱 해치운다.


맛도 좋지만 나는 만들어지는 과정의 단순함이 너무 좋다.

부추와 애호박이 어떻게 서로를 잘 붙잡고 있는지 뒤집을 때 타이밍을 잘못 잡으면 후드득 떨어져 속상하게 하는 김치전과는 달리 뒤집개로도 쉽게 모양이 헝클어지지 않고 뒤집히는 부추전은 너무 간결하고 쉽다.     


나의 삶도 인간관계도 그냥 이렇게 넣고 버무리기만 하면 찢어지지 않고 잘 부쳐지는 단순함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때론 과한 배려가 관계를 찢어버리기도 하고 작은 오해가 관계를 뒤집어 버리기도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복잡함 속에서 계속 단순함을 찾으려 애쓰는 고행의 시간을 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렴.

마음은 늘 복잡해도 비 오는 날 내가 부쳐낸 전은 너무 바삭하고 맛있다.

남편 역시 너무나 맛있게 전을 먹어준다.

그래, 그럼 일단 잘 된 거라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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