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과 행동 사이
누구나 한 번쯤은 거치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
때로는 헤매고, 때로는 발견하는 그 순간들을 기록합니다.
나는 윤동주가 싫었다
그의 유약함이 싫었다.
고등학교 시절, 문학 교과서 속 윤동주는 늘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시인이었다.
나는 그가 부끄러워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 같아 싫었다.
대신 백석이 좋았다.
그의 올곧음과 꺾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내 청춘의 우상이었다.
어제는 수능날이었다.
SNS를 가득 채운 수험생들의 이야기를 보며, 문득 고등학교 시절의 윤동주가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다. 시를 쓴다는 것이,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를.
17살의 나는 행동하지 않는 성찰을 경멸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깊은 성찰 없는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자신을 마주하는 치열한 싸움이었다. 그의 부끄러움은 오히려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백석의 결기 어린 시와 윤동주의 성찰적인 시는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선택한 표현 방식이 달랐을 뿐.
시간이 흐르며 나는 점점 더 윤동주의 시에 기대어 간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그의 섬세한 성찰이 주는 위안이 깊어진다.
가끔은 생각한다. 고등학생의 나는 왜 그토록 윤동주를 불편해했을까.
어쩌면 그때의 나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끊임없이 부끄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을 인정하기가 두려웠던 걸까. 나약해 보이는 것이 두려워 더 강하게 부정했던 걸까.
이제 나는 안다.
진정한 변화는 때로는 고요한 성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행동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윤동주의 시가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그의 성찰이 지닌 진정성과 깊이 때문일 것이다.
수능날의 이 특별한 아침, 나는 다시 한 번 윤동주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야 깨닫는다.
자신을 돌아보는 용기가 때로는 가장 큰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은 내게 윤동주를 다시 읽게 했고, 그의 시를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읽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