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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미 Oct 27. 2023

태동

1991년 초, 테스트기에 뜬 선명한 두 줄을 확인하고, 산부인과를 찾아 정확한 주수를 알아내고,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함께 기뻐했어도, 심지어 아랫배가 봉긋이 살이 찐 것 같아도, 태동을 느끼기 전까지는 내 안에 네가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어. 여러 번 너와 내가 늘 함께라는 것을 잊고, 출발하려는 버스에 타려고 달리기도 했지. 그러다 멈추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게 된 것은 너의 움직임이 느껴진 다음부터였어. 그렇게 조금씩 더 자주 너는 너의 존재를 알렸고 나는 매번 놀라워했지.


식성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는 네가 찾아왔어도 못 먹거나 혹은 갑자기 유독 먹고 싶은 음식이 없었어. 게다가 아가씨적부터 허리가 부실해서 걸핏하면 힘들어했던 것을 아는 나의 지인들은 네가 쑥쑥 자라는 동안 전혀 요통에 시달리지 않는 나를 신기해했지. 너는 이미 나의 기쁨이요, 위로였던 거야.


아빠와 함께 병원에 가는 날이면 늘 흥분되고 가슴 떨리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어. 그날도 정기 검진일이었는데, 의사 선생님은 네가 나올 준비를 시작했다며 집에 가서 출산 용품을 챙겨서 다시 오라 하셨어. 짐을 챙겨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가로수를 바라보았어. 단풍 든 플라타너스가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어. 


진통은 교과서처럼 몰려왔고 나는 출산 전에 공부하고 다짐했던 대로 놀라지 않았어. 차근차근 산통의 간격이 가까워질수록 널 더 빨리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붙들고 정신을 차리고 견디어 냈어.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힘차게 버둥대는 너의 팔다리가 간호사에게 들려 닦여지고 싸여서 나의 품에 올 때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어. 비슷한 시기에 세상에 나온 아기들이 모여있는 신생아실에 가지 않고 너는 내내 산모 회복실에서 나의 젖을 먹고 태변을 보고 쿨쿨 잠을 잔 다음 몇 시간 후 엄마 아빠와 함께 집으로 왔지. 딸 만 셋을 낳은 너의 외할머니는 평생 안아보지 못한 당신의 아들을 얻은 것 마냥 신기해하며 사랑해 주셨어.


생전 처음 느꼈던 미세한 생명의 움직임을 알아차렸을 때처럼 나는 지금도 너를 생각할 때마다 고맙고 감격스러워. 너의 독일 생활을 축복한다. 힘내라! 가을과 초겨울 모퉁이, 너의 생일을 담고 있는 11월이 다가오면 나는 늘 멀리 있는 네가 더 그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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