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뭐였더라? 아끼던 책을 창밖으로 던져버리던 짝의 얼굴이었나? 아니면 훈육인지 분풀이인지 알 수 없던 선생님의 매질이었나? 그도 아니면 다정한 말투로 가슴을 흔들던 따뜻했던 친구의 목소리였나?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내 머릿속에는 하루 종일 무언가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고, 다리를 떨고, 같은 단어를 수십 번 써 내려가도 도무지 사라지지 않던 생각들. 그때가 중학교 무렵이었다. 호기심이 많아서 그렇다고, 크면 다 좋아진다며 무심히 말하던 엄마의 얼굴도 어렴풋 기억난다.
그때의 나는 자신이 압축하던 폐지에 깔려 죽은 '한탸'가 된 기분이었다. 참기 힘든 답답함과 시간이 주는 갑갑함. 참으로 더디고 지루한 시절이었다. 안전한 미래를 위한 만들어진 꿈들도 왠지 억울하고 허무했다. 학교가 즐겁다던 꽃밭 같던 친구들도, 재미없는 인생 얘기를 지루하게 자랑하던 선생님도, 전혀 이해되지 않던 배움이라는 과정들도... 고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떠나지 않았다. 읽고 破紙 하기를 수천번, 결국 그곳에서 죽어가던 한탸처럼 나도 거기에 있었다.
만들어진 길 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지독한 용기가 필요하다. 당연히 나는 그것이 없다. 그러니 길 밖은 생각하지 못하고, 길안은 적응하지 못한 조나단 노엘이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별거 아닌 비둘기가 무서워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깊이가 없다."는 무의미한 말로 자신을 망쳐버린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같은 존재, 사람들은 그런 나를 강박장애라고 불렀다.
나는 '행복하다'. 말의 공허함을 안다. 그래도 요즘 자주 행복을 생각한다. 오늘 내가 좋았던 순간이 있었던가? 수십 번 닦은 거울과 반들거리는 그릇들도 생각해 본다. 나는 쓰레기를 모으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손바닥이 찢어지도록 닦아대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가? 증오스러운 행위가 끝나고 만족이라는 가벼운 감정도 느낄 수 있으니 이런 게 행복이 아닌가? 자조 섞인 생각들도 자주 한다. 언젠간 비둘기를 따라 길을 나서는 내 모습도 상상해 본다. 별거 아닌 인생 중 별거 아닌 하루가 별일 없이 지나가고, 별거 아니던 작은 일상들이 아직은 내 곁에 있으니... 이렇게 살다 보면 인생도 견뎌지지 않을까?
1)한탸: 보후밀 흐라발 "너무시끄러운 고독"의 주인공, 2)조나단 노엘: 파트리크 쥐스킨트 "비둘기"의 주인공, 3)콘트라베이스 연주자: 파트리크 쥐스킨트 "콘트라베이스"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