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수학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사후 아카데미아 학장직을 맡게 되지 못함에 따라 아테네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몇 년 후에 자신의 고향 인근에 위치한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2세의 요청으로 그의 아들 알렉산더(우리에게 익숙한 그 알렉산더 대왕이 맞다)의 교사로 봉해진다.두 사건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정치학>을 (현재는 강의용 저작만 남아있지만) 순차적으로 집필하며 자신의 견해를 영글게 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지극히 개인적으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정치학>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명징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특히, 총 10권으로 구성된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한다.
동굴의 우상에서 벗어나 이데아(idea)를 희구했던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현실이 이데아이기에 동굴의 우상이 어떻게 직조되어 있는지를 톺아보기를 바란다. 다시말해, 현재를 구성하고 있는 환경(이자 자연)은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고, 적절히 판단(및 정의)할 수 있는 중용을 다방면에서 지키기를 제언한다.(이런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을 바라봐야 한다고 시종일관 원용한다 [1].)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2권부터 정의, 자부심, 기개, 절제와 같은 실제적인 덕목을 예시를 들면서 실천적 지혜를 통해 중용을 지킬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즉, 그는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방법들과 기준에 대해 비례와 변증법으로 전개한다.
이런 점에서 <조커:폴리 아 되>는 유용한 교보재가 된다. 과연 조커는 아서플렉의 분할된 자아인가? 아니면 두 개는 함께 혼재된 존재인가? 나아가 아서플렉의 외면에서 조커를 본 존재는, 조커의 외면에서 마찬가지로 아서플렉을 볼 수 있는가?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한 배역이 아서플렉이자 조커라면, 대중의 역학(이데아)은 과연 개인(우상의 동굴)에게 어디까지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조커>와 <조커:폴리 아 되>의 감독 토드 필립스
이에 대해 감독 토드 필립스는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에 빛을 쬐 그림자(이자 심연)를(을)만들고(드러내고), 아서플렉의 흡연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조커:폴리 아 되> 中
아리스토텔레스는 내면의 표출이 된 이후에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한다 [2].그렇다면 다수의 환상과 기대에 끊임없이 부응하는 것만이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일까 [3]?셰익스피어 <헨리4세> 속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Uneasy lies the head that wears a crown)"는 대사가 떠오를 따름이다.
한편, 자신의 할아버지의 이름이자, 아들의 이름인 니코마코스를 빌려 윤리학을 전개하는 점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선조의 ‘명예’를 내걸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자부심’이 그에게 있음을 반증해 줌과 동시에, 후손에게도(동시에 알렉산더 대왕에게도) 중용과 미덕의 문제를 가르칠 수 있을 만큼 간결하고 쉽게 적어내고자 한 것이라 (지극히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왕의 전속교사로 배속되고자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집필했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하지만 그의 글은 내다볼 줄 아는 실천적 지혜를 함양하는 방법과, 정치와 법에 대해 논하고 있기 때문이고, <니코마스 윤리학>의 말미에 <정치학>에서 추가적인 함의를 다루겠다 언급하는 점은 관조적인 삶과 정치참여의 삶의 조화를 이루겠다는 시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단문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생각할 거리와 상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1] 그러나 삶이 그 자체로 좋고 즐거운 것이라면(아닌게 아니라 모든 사람 특히 훌륭하고 더없이 행복한 사람들이 삶에 더 애착을 갖는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런 것 같다. 그들의 삶은 가장 바람직하고 그들의 존재는 가장 축복받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보는 사람이 자기가 본다는 것을 지각하고, 듣는 사람이 자기가 듣는다는 것을 지각하고, 걷는 사람이 자기가 걷는다는 것을 지각하고, 그 밖의 다른 활동에서도 자기가 그런 활동을 한다는 것을 지각하는 무엇인가가 있어, 우리가 지각하면 우리가 지각한다는 것을 지각하고 우리가 사고하면 우리가 사고한다는 것을 지각한다면, 그리고 지각하거나 사고하는 것을 지각하는 것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이라면 (우리도 보았듯이 존재란 지각 또는 사고이니까),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이 그 자체로 즐겁다면(삶은 본성적으로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이 우리 안에 있다고 지각하는 것은 즐거우니까), 그리고 삶은 좋은 사람들에게 특히 바람직한 것이라면(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 자기 안에 있다고 지각하는 것은 즐겁기에, 또한 그들에게는 존재한다는 것이 좋고 즐거우니까), 그리고 훌륭한 사람은 자신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친구에게 느낀다면(친구는 제2의 자아니까), 그렇다면 각자에게 친구의 존재는 자신의 존재가 바람직한 만큼 또는 그와 비슷한 정도로 바람직할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천병희 역. p.362)
[2] 행위의 제1원리, 즉 행위의 목적인(目的因)이 아닌 작용인(作用因)은 합리적 선택이며, 합리적 선택의 제1원리는 욕구와 목적지향적 이성이다. 그래서 합리적 선택은 지성과 사고뿐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 없이는 불가능하다. 훌륭한 행위와 그에 반대되는 행위는 사고와 마음가짐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고 자체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며, 목적지향적이고 실천적인 사고만이 움직인다. 그런 사고는 제작적 사고도 지배한다. 왜냐하면 제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어떤 목적을 위해 제작하며, 제작된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또는 특수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훌륭한 행위는 하나의 목적이며 욕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리적 선택은 욕구에 관련된 지성이거나 사고에 관련된 욕구이다. 그리고 인간이 바로 그런 종류의 제1원리이다. 지난 일은 합리적 선택이 아니다. 이를테면 트로이아의 약탈자가 되기를 선택할 수는 없다. 누구나 지난 일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만을 숙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일어난 일을 일어나기 이전 상태로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가톤의 말은 옳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천병희 역. P.219)
[3] 그러나 유용성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방 자체를 사랑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뭔가 덕을 볼까 해서 사랑한다. 이 점은 쾌락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재치있는 사람을 그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재미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따라서 유용성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유익한 것 때문에 남을 사랑하며, 쾌락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즐거운 것 때문에 남을 사랑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남을 그의 사람 됨됨이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 유익하고나 즐거운 존재로서 사랑한다.
그러면 그런 우애는 우연적이다. 사랑받는 사람이 자신의 사람 됨됨이 때문에 사랑받지 않고, 단지 어떤 이익이나 쾌락을 제공하는 자로서 사랑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우애는 양쪽이 계속해서 같은 자질을 보여주지 못하면 쉬이 소멸된다. 한쪽이 더 이상 즐겁지 못하거나 유용하지 못하면 다른 쪽이 그를 사랑하기를 그만둔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천병희 역. P.299-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