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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땅구 12화

땅구

1. 축복과 저주(12)

by 유봉


거실과 맞닿은 오픈형 구조의 주방은 대여섯명이 들어가 동시에 요리를 해도 될 정도로 넓고 쾌적했다. 주방가구와 수납장, 양문형 냉장고와 최신식 가전제품까지 모든것이 벽면을 따라 깔끔하게 매립이 되어 세련되고 깔끔한 느낌을 주었다. 수납가구와 싱크대는 전부 흑단 목재를 사용하여 맞춘 것으로, 정교한 용문양의 황금빛 손잡이를 달아 놓았고 백색 대리석 상판으로 마감되어 있었다.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이 품격있는 주방은 주부들이라면 누구나 부러워 할 만큼 잘 꾸며져 있었다. 이는 춘광의 부모가 애딸린 장님 서방에게 시집을 오는 도순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그곳에 도순은 자신의 취향대로 물건들을 채워 넣었는데, 수저와 그릇, 접시와 주방 집기 하나하나까지, 전부 다 황금빛으로 번뜩거렸다. 물론 이것이 전부 순금일리 없었지만 그 빛깔과 자태 만큼은 상당한 값어치가 있어 보였다. 그것들이 흐트러짐 하나 없이 정리가 되어 있으니, 이곳이 대체 요리를 위한 공간인지 전시를 위한 공간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는 가진 것 없이 살던 도순의 보상심리와 허영심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 적도(赤道)의 얼음궁전 같은 공간은 더이상 도순에게 설레임을 가져다 주지 않는 듯 점점 더 그녀가 머무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대신 연희가 그 시간을 채워가고 있었다.

라면 냄비가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연희가 가스불을 끄자 옆에서 조잘거리며 지켜보던 민철이 또르르 달려가 식탁 앞에 앉았다. 연희는 집게를 들고서 준비해 놓은 대접에 라면을 퍼 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괘나 능숙했다.

도순이 외부에 신당(神堂)을 차린 뒤로 한달에 한두번씩은 신들께 기도를 올린다는 이유로 야심한 시각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곤 했는데, 한달 전부터는 그 횟수가 일주일에 두번 정도로 잦아졌다. 그럴때마다 춘광과 민철의 식사를 챙기는 것은 연희의 몫이었다. 처음 한동안은 어렵지 않게 차려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마련해 놓고 가던 도순이, 이제는 일이 바빠졌다는 이유로 그런것도 하지 않았다. 얼마 동안은 배달을 시켜 먹었지만 몸이 쇠약해진 춘광이 자극적인 음식을 소화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도순의 요리솜씨가 나쁘지 않았기에 연희는 그녀에게 요리를 배워 보고자 했으나, 도순이 가르쳐 준 것은 고작 쌀을 가지고 죽을 끓이는 법 뿐이었다. 다행히 연희가 끓인 죽을 춘광은 맛있게 먹어주었다. 그러나 어린 민철은 밋밋한 쌀죽을 먹는 것을 힘들어 했다. 연희는 민철을 위해 라면을 끓여주었고, 이따금씩 춘광도 라면을 먹고 싶어해 세 식구가 라면으로 저녁을 떼우는 날도 적지 않았다.

금세 라면 세 그릇을 담아낸 연희는 국자로 국물을 옮기며 양을 맞추었다. 얼핏 보기에도 한 그릇의 양이 턱없이 적었다. 듬뿍 담긴 대접을 먼저 든 연희가 식탁으로 가 춘광의 앞에 내려놓았다.

“아버지, 드세요.”

식탁 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 앉아 있던 춘광이 손을 더듬어 식탁을 잡고서는 의자를 바로 해 앉았다. 그가 별 말 없이 젓가락을 들자 연희가 그의 왼손을 잡고서 조심스럽게 대접에 가져다 대 주었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그가 익숙한 듯 한 젓가락을 떠 입으로 가져가자 연희는 그제서야 민철의 것을 가지러 갔다.

“맛있다. 연희 솜씨가 점점 더 좋아지는구나.”

민철의 앞에 라면을 가져다 준 연희가 춘광을 보았다.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영배의 죽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는 계속 고민이 많은 얼굴이었다. 때문에 영배의 죽음으로 충격과 슬픔에 빠져 있던 연희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영배의 죽음이 도순에게 화를 입히게 될 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춘광이 피해를 받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그런 것으로 고민이 깊어지는 춘광을 보자 연희는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은 누구 하나도 편하게 만들지 않는구나. 연희는 춘광에게까지 화가 미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춘광이 영배와 영배 가족을 위해 조문을 가자는 말을 해주길 바랬다. 너무 고통스럽게 떠난 영배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주고 싶은 것이 어린 소녀의 순수한 마음이었다.

연희는 양이 적은 대접을 들고 와 민철의 옆에 앉았다. 민철은 배가 많이 고팠던 듯 이미 한 입 가득 넣어 오물거리고 있었다. 천천히 먹으라는 말을 하고서 연희도 젓가락을 들었다. 그렇게 주방과 거실 사이에 놓인 6인용 식탁에 앉은 세 식구의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밤 9시가 한참 넘은 시각이었다.

춘광은 라면을 먹는 둥 마는 둥 끄적거리만 하였다. 도순의 귀가가 늦어질수록 점점 더 그의 얼굴에 주름이 늘어갔다. 도순에게 영배의 죽음을 알리고 나서 얼마 후 그녀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도순은 알아서 일처리를 할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춘광은 굿이 잘못된 거냐고 물었다. 도순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했더니 도순이 답했다. “그 날 물리친 것 말고 한 놈이 더 있었어요. 진짜 악귀가.” 춘광은 그럼 이제는 어찌해야 하냐 물었다. 도순은 일단 모르는 척 함구하고 있으라 말했다. 춘광은 이후로 외인들에게 두 번의 전화를 받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였다. 그는 도순이 빨리 들어오기를 바랬다. 이후의 일을 논의하자면 꽤나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그의 바램이 닿은 것일까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 엄마가 온 것이냐?”

마음이 급한 춘광이 문이 열리기도 전에 물었다. 민철은 현관을 빤히 쳐다보았고 연희가 일어나 현관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용진이었다. 민철은 용진이 왔음을 조용히 춘광에게 알렸다. 춘광이 민철에게 시간을 물었다. 9시 40분이라는 답이 들려오자 춘광은 미간을 잔뜩 지푸렸다.

용진의 귀가시간은 늘 제멋대로였다. 매일같이 친구들과 어울려 허튼짓을 하고 다녔는데 요새는 한창 PC방에 빠져 밤 늦게 들어오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춘광이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지만 소용 없었다. 용진이 가족과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것이 자신의 탓인가 하여 춘광은 부자간의 진지한 대화를 나눠보려고도 했지만 그것 또한 소용 없었다. 용진은 춘광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민철에게 신경질을 부리며 못살게 구는 일만 늘어갔다. 애가 이 지경인데도 도순은 따끔하게 혼을 내기는 커녕 늦은 밤에도 용진의 방으로 식사와 간식을 챙겨다 주며 감싸고 돌았다. 그러니 아비인 춘광의 위신이 서지 않았다. 춘광은 용진보다 도순이 더 이해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도순은 용진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런데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듯 행동하니 이상할 노릇이었다. 학원을 보내라 해도 됐다 하고, 운동을 배우게 하라 해도 됐다 하고,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이냐 물으면 건강하게만 자라면 된다 하고, 아이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냐 물으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를 잘 만나는 것이라 답했다. 춘광은 그말에 동의할 수 없어 아이의 인성이 바로 서는 것이 우선이라 말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이 가관이었다. 아버지의 인성이 훌륭하면 자식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보고 배운다는 말이었다. 한마디로 너나 잘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기에 춘광은 좋은 모습만 보이려 노력했지만 이제와 보니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 있었다. 지금 용진이 하는 짓을 보면 정말 소황제(小皇帝)가 따로 없었다.

신발을 벗는 용진을 향해 연희가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용진은 듣는 척도 없이 제 할 말만 하였다.

“엄마는?”

연희는 용진에게서 풍겨나는 담배 냄새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아직 안 들어오셨어.”

거실에 들어선 용진은 세 식구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용진은 춘광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아직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장님이란 말인가. 이것은 용진에게 있어서 트라우마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 집에 들어오면 편히 살 수 있다는 말에 도순의 결혼을 말리지 않았지만 용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밑지는 장사 같았다. 용진이 알기로 도순은 굳이 춘광과 혼인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만큼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부(生父)가 남긴 재산과 보험금이라는 것까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뭣하러 이런 사람 구실도 못하는 인간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려는 것인지, 용진은 도순이 이해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이전의 결혼생활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용진은 사실 아버지라는 단어 그 자체에 거북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틀이 멀다 하고 손찌검을 당하는 도순을 보며 자랐기 때문이었다. 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서 자란 용진은 그 마을에서 제일 한심한 인간을 아비로 두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한량짓을 하고 다니며 술만 퍼마시는데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는 못난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 일을 제대로 할 리 없었다. 술값이라도 벌어보려 노가다를 찾아 나가도 반나절 만에 싸우고 돌아오는 일이 허다했다. 성격이 만만치 않은 도순이 잔소리라도 하는 날에는 당장에 손부터 날아왔는데 아무리 도순이라 해도 남자의 완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용진 애비가 군대에서 큰 사고를 당해 제정신이 아닌 것을 알았기에 딱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 이쁘고 착한 아내의 얼굴에 멍자국이 가실 날이 없자 사람들은 그를 보며 인간이길 포기한 놈이라 손가락질을 해댔다. 허나 그럴수록 그는 더 엇나가기만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도순을 향한 그의 손찌검은 멈추게 되었다. 그가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 것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무슨 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차라리 잘 된 일이라 하였다. 도순이 그를 살뜰히 보살폈지만 그는 폭력적인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매일 화만 내고 술에 찌들어 살다가 일년도 안되어 세상을 떠나 버렸다.

용진에게 있어 아버지는 눈꼽만큼도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인간이 눈이 멀어버린 날부터 용진은 또래 아이들에게 장님 애비를 두었다며 갖은 놀림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큰 상처가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용진은 도순이 재혼을 하지 않고 조용한 마을에 정착해 평화롭게 살기를 바랬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도순은 또 다른 장님 서방을 맞이하고 말았으니 용진이 자꾸 엇나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린 용진이 아직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가 생부라 알고 있던 눈 먼 애비가 그의 생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 것은 병에 걸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용진은 제 엄마가 없으면 밥도 제대로 차려 먹지 못하는 인간들을 마치 버러지 보듯 하였다. 그 눈빛을 보지 못한 연희가 걱정이 되어 말했다.

“밥은 먹었어? 라면 끓였는데 같이 먹어.”

“됐어. 너나 많이 먹어.”

용진이 매번 집안의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들자 춘광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하였다.

“너무 늦게 다니는 거 아니냐?”

용진이 외인(外人)처럼 겉돌아도 춘광의 자식이었고, 어른처럼 행동해도 아직 6학년 아이였다. 춘광이 평소에 잔소리가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꼭 한마디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상관 없잖아요.”

용진이 귀찮다는 듯 대꾸하자 춘광이 대뜸 호통을 쳤다.

“왜 상관이 없어?”

춘광의 목소리가 힘없이 갈라지더니 다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연희가 놀라 살폈지만 그는 괜찮다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가 애써 기침을 참아내며 말했다.

“용진이 너 이리 와서 앉아 보거라.”

“몸도 안좋은데 그냥 쉬세요.”

용진은 무심한 투로 한마디 내던지고는 걸음을 옮겨 제 방으로 휙하니 들어가 버렸다.

“저, 저런 못된 놈!”

춘광은 화를 낼 기력도 없어 보였다. 그런 춘광이 걱정되어 연희가 얼른 다가가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아버지. 신경쓰지 마시고 좀 더 드세요.”

라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리 없는 춘광이었다.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구나, 힘들게 차려 주었는데. 너희들이라도 많이 먹거라.”

연희가 얼른 벽에 기대어 둔 지팡이를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힘없이 걸음을 옮겨 소파에 가 앉았다.

춘광은 도순에게 너무 많은 것을 맡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도순이 다 알아서 해주니 편하고 고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집안의 중심을 잡아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가족 간의 유대관계는 커녕 불신의 골만 깊어져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필연 연희와 민철에게 피해가 갈 것이었다. 그는 도순에게 자신의 의견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내비칠 것을 다짐했다. 물론 영배의 죽음에 관한 일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침이 되고 누나와 형은 학교에 갔다. 나는 누나가 해놓은 계란 후라이로 아침밥을 떼웠다. 아버지는 입맛이 없다며 어제부터 잘 먹지를 않으신다. 어머니는 어젯밤 늦게 들어오셨다가 아침일찍 또 나가셨다. 바쁜 일이 생긴 것 같다. 난 거실에 앉아 그림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10시쯤 되자 아버지가 방에서 나오셨다.

“민철아. 밖에 나갈 준비해라.”

아버지께 물었더니 병원에 간다고 하셨다. 그 전에 밖에서 맛있는 걸 먹자고 하셨다. 난 신이 나서 얼른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버지와 난 외출준비를 끝내고 집을 나섰다. 밖에서 조금 기다리니 어머니께서 차를 타고 데리러 오셨다. 운전석에는 다른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몇일 전 영배형 집에서 올 때 데려다 주었던 그 아저씨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를 왜 데리고 왔냐고 아버지께 화를 내셨다.

“민철이가 어젯밤부터 제대로 먹지 못해서 오늘은 좀 제대로 된 걸 먹여야겠소. 어차피 병원이야 민철이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잖는가?”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표정이 좋지 않으셨다. 우리는 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한참을 가서 멈춘 곳은 엄청나게 큰 식당이었다. 어머니가 잘 아는 유명한 식당이라고 했다. 우리는 거기서 다같이 밥을 먹었다. 이쁜 아주머니가 고기를 구워주었다. 한우라는 고기였는데 맛이 정말 꿀맛이었다. 누나가 없어서 아쉬웠다. 그래서 난 누나 몫까지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아버지도 좋아하셨다.

밥을 다 먹고 우리는 또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갔다.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고 이뻐해주셨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차는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꼬불꼬불 움직이던 차는 무지 큰 건물로 들어가 지하로 내려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어머니는 나에게 10분만 기다리라고 하셨다. 아버지 주사만 맞고 금방 내려올거라고 해서 난 알겠다고 하였다. 아저씨와 어머니가 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난 차 안에서 기다렸다. 심심해서 차 안을 살펴보았다. 엄청 비싼 차라고 예전에 누나가 말해주었다. 그런데 왜 어머니 차를 아저씨가 가지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이것저것 만져보았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난 동그란 운전대를 움직여보고 싶었다. 앞으로 몸을 기울여 운전대를 잡았다. 힘을 주어 움직여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재미가 없어서 다시 제자리로 오려는데 의자 옆에 무언가 떨어져 있었다. 한약 같이 보여 난 손을 집어넣어 힘들게 빼내었다. 투명한 비닐에 담겨 있는 것은 한약이 아닌 것 같았다. 새빨간 액체가 들어있었는데 뭔지 알 수 없었다. 난 기분이 나빠서 원래 자리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를 기다렸다.

10분이면 온다고 했는데 벌써 30분이나 지났다. 차에서 나가면 안되는데 배가 너무 아팠다. 고기를 너무 많이 먹었나보다. 난 화장실만 금방 갔다오기로 했다.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로 갔다. 8층까지 있었는데 우선 1층으로 갔다. 1층에 내려 화장실을 찾았다. 경비 아저씨가 보이길래 부탁을 했다. 경비 아저씨는 화장실을 쓰라고 하셨다. 난 금방 일을 끝내고 나왔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경비아저씨한테 병원이 어딘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경비 아저씨는 이 건물에는 병원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난 알았다고 하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로 다시 내려가려던 나는 아버지가 어디갔는지 궁금했다. 2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난 고개를 내밀고 양 옆으로 살펴보았다. 다시 3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또 다시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았다. 아버지도 병원도 없었다. 그냥 갈까 하다가 4층을 눌러버렸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고개를 내밀었을 때 멀리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운전을 한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전화를 끊고 어딘가로 들어가 버렸다.

이상했다. 아저씨가 들어간 곳은 병원이 아니었다. 불꺼진 간판 위에는 노래방이라고 써 있었다. 나는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병원 냄새가 지독했다. 어두웠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안쪽에서 사람들 말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몇 개의 방을 지나서 사람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방 안에는 책상과 병원 침대 그리고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침대 위에 아버지가 누워있었다. 누군가 아버지의 볼을 꼬집으며 깨우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깊이 잠이 든 것 같았다. 어머니는 누군가한테 막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난 너무 무서워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운전을 하고 온 아저씨가 나를 안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어머니가 뒤따라 왔다. 어머니의 손에는 주사기가 들려있었다. 나는 목 뒤가 따끔한 걸 느꼈다. 그리고 기억이 없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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