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땅구 11화

땅구

1. 축복과 저주(11)

by 유봉

어느 날 갑자기였다.

춘광이 데려온 여자는 자신을 촌부(村婦)라 소개하였다. 소박한 차림에 예의바른 행동과 건강한 몸매에 시원한 이목구비까지, 그녀의 첫인상은 눈 먼 홀아비에게는 과분할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춘광과 혼인을 하겠다 하니 춘광의 부모는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생겼다. 충분히 더 좋은 혼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여자가 왜 굳이 애가 둘이나 딸린 장님 서방을 두겠다 하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춘광의 집안이 꽤나 부유한 편에 속했기에 때문이다.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는 상황을 충분히 가정할 만 하였다.

여자는 흔하디 흔한 사랑 타령 따위 하지 않았다. 뻔하디 뻔한 억지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솔직하게 그리고 담백하게 말했다. 더이상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하루하루 먹고 사는 걱정으로 삶을 연명하고 싶지 않다고. 그러면서 우여곡절의 40년 인생을 읊어대었다. 그녀의 이야기 끝에 춘광의 부모는 의심을 풀고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초초한 그녀의 인생에 손을 내밀어 주었다.

연희 남매에게는 어떠한 선택권도 없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다섯 식구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두 명의 식구가 늘어났다. 남매는 갑자기 생긴 엄마와 형제에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새엄마라 소개한 여자는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제 배 아파 낳은 새끼와 다르지 않게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학교에 보내고, 지극 정성이었다. 그녀는 똑부러질 정도로 살림과 육아를 잘 해내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

두달이 지나고 춘광의 부모는 분가를 하였다. 아무래도 아파트는 대가족이 살기에는 불편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내의 중심가에 위치한 고급아파트는 이제 춘광부부와 세 남매만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춘광의 아내는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춘광에게 조금씩 잔소리를 하기도 했고, 아이들을 다그치거나 혼내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그녀는 시부모가 쓰던 방을 그녀의 아들에게 내주었고 연희와 민철과는 섞이지 않게 하였다. 그렇게 그녀가 가족의 중심이 되었다.

석 달이 더 지난 어느 날 춘광의 집안에 파란이 일었다. 춘광의 아내가 무당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춘광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던 터라 개의치 않았지만 춘광의 부모는 아니었다. 독실한 기독교인 집안에 무당이 웬 말인가. 그 사실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결혼은 한사코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로 인해 춘광의 부모는 춘광의 결혼 생활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살림을 합치자거나, 무당을 그만두라거나, 아이들 만이라도 본인들이 키우겠다는 둥 몇몇 조건과 요구들이 있었지만 춘광의 아내는 그 어떤 것도 들어주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춘광의 부모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춘광 아내의 뒤를 파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거짓말이 드러나자 춘광의 부모는 완전히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나 거기까지였다. 춘광의 부모는 손도 쓰지 못하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일년이 지난 따뜻한 봄날이었다.

연희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등에 멘 책가방을 양손으로 부여잡고서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모습이 너무나 처량했다. 연희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듯 고민에 빠진 연희는 신발을 바닥에 끌며 맥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잠긴 채 걷던 연희는 어느새 집 앞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파트 입구로 들어선 연희는 가까이 보이는 현관문 앞으로 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104호, 그곳이 연희의 집이었다.

“누나. 나 레고 다 만들었어.”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코앞에서 민철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어락 소리를 듣고 뛰어나온 모양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선 연희는 민철이 자랑스럽게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레고 블럭으로 만든 여객기 모형이었다. 며칠동안 붙잡고 있더니 드디어 완성한 모양이었다. 일곱살 아이가 만들기에는 난이도가 있는 것이라 칭찬을 해 줄 만도 했지만 연희는 정신이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민철의 머리를 대충 한번 쓰다듬어준 연희가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방에 계셔.”

춘광의 방문은 닫혀 있었다. 그 사이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새어나왔다. 연희는 의아했다. 클래식이라니. 그것은 이 집에서 금지된 음악이었다.

“누나. 무슨 일 있어?”

평소와 다른 연희의 표정에 민철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연희가 기운없는 목소리로 대충 말하자 민철도 시무룩해져 버렸다.

거실로 들어온 연희는 가방을 내려놓고 춘광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없이 조심스레 문을 열자 음악소리가 크게 퍼져 나왔다. 창가 옆으로 놓인 넓은 침대 위에는 춘광이 보이지 않았다. 도순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다녀온 뒤로도 이틀 간이나 침대에 누워 기침을 해대던 춘광이었다. 그런데 있어야 할 자리에 그가 보이지 않자 연희는 더욱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연희는 조금 더 문을 열고서 몸을 반쯤 밀어넣었다. 엉뚱한 자리에서 춘광을 발견한 연희는 기척을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춘광은 방구석에 쳐박혀 있다는 말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TV 옆 벽모서리에 기대어 앉아 있는 그는 아주 평안한 표정이었다. 그의 옆에는 어울리지 않는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분홍색 바탕에 하얀 천사 날개가 양 옆에 그려진 어린이용 책가방이었다. 활짝 열린 가방 안에는 케이스에 담긴 수십개의 카세트 테잎이 차곡차곡 들어차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가방 주변의 방바닥에도 십수개의 테잎이 이리저리 마구 널려 있었고, 새끼 손가락 만한 건전지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어지러운 현장 속에서 춘광은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연희는 춘광의 두 손에서 돌아가고 있는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보았다. 너무 낡아 골동품처럼 보이는 그것은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는 듯 쩌렁쩌렁한 소리를 울려대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의 것들처럼 맑고 고운 소리는 아니었다.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을 갉아먹는 듯 중간중간 거슬리는 잡음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귀가 예민한 춘광이 듣기에는 분명 적절치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춘광은 만족한 표정으로 선율에 맞춰 살며시 고개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조금은 나아진 모습으로 활동을 하자 연희는 그것 자체로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흔 두 개의 카세트 테잎, 그것은 젊은 시절 춘광의 음악 활동을 기록해 놓은 것이었다. 춘광의 부모가 직접 녹음해 놓은 그것은 춘광의 인생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도순은 쓰레기통에 가차없이 쳐박아 버렸다. 춘광이 간직해 오던 바이올린과 클라리넷은 물론이고 연주회에서 입었던 의상들 역시 같은 처지가 되었다. 춘광의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나흘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 이유없이 그런것은 아니었다. 도순은 그 전부터 이미 클래식 음악의 기운이 집안과 맞지 않는다며 춘광에게 무악(巫樂)을 배울 것을 강요했었다. 그러나 춘광의 부모가 그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카톨릭 집안에 무당 며느리가 들어온 것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판인데, 아들마저 굿판에서 놀아난다면 죽어서도 주님의 곁에 들지 못 할 거란 생각에, 춘광의 부모는 집까지 찾아와 드러눕는 시위를 하였다. 결국 한발 물러선 도순이었지만, 춘광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 본색을 드러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춘광의 부모가 사고를 당한거라며, 춘광에게서 클래식 음악을 빼앗고 무악에 전념하게 하였다. 춘광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도순의 말을 듣고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도순에게 사정을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카세트 테잎 만큼은 버리지 말아달라고. 그 모습이 너무도 처연할 정도였지만 도순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매우 큰 상실감에 사로잡힌 춘광의 표정이 연희는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 날 새벽, 모두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린 연희는 조용히 일어나 불을 밝혔다. 그리고 은밀하게 민철을 깨웠다. 민철에게 망을 보게 한 연희는 창문을 열었다. 아파트 외벽을 따라 이어진 가스 배관이 손 닿는 곳에 있었다. 연희는 창고에서 꺼내 두었던 얇은 밧줄을 가스 배관에 꼼꼼하게 묶은 뒤 바닥에 닿을만큼 내렸다. 그래봤자 2미터 남짓한 높이였다. 창문 바깥으로 매달린 다음 뛰어 내린다면 아래가 잔디밭이었기 때문에 다칠 위험은 없었다. 그러나 올라올 때가 문제였다. 연희는 가스배관을 잡고서 팔힘만을 이용해 올라올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50센티미터 간격으로 발을 끼울 수 있는 매듭을 만들어 밧줄을 내린 것이었다. 준비를 마친 연희는 신발을 신고 창문 위에 올라섰다. 밧줄을 타고 바닥에 내려선 연희를 보고 민철이 가방을 던져 주었다. 연희는 곧장 쓰레기장으로 가 춘광의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20분이 지나 방으로 돌아온 연희는 가방에서 카세트 플레이어 하나와 수십개의 카세트 테잎을 꺼냈다. 연희는 그것을 어디에 보관해야 할까 생각했지만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방 안에 두기로 결정했다. 남매의 방은 도순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연희는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남는 책가방에 카세트 테잎을 차곡차곡 담아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도순은 그것이 춘광의 보물일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였다.

연희는 그 사실을 조용히 춘광에게 알리며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도순이 버린 악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춘광은 또 사람 좋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악기는 좋은 주인을 찾아가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카세트 테잎은 세상에서 사라질 운명이었으니 이걸 돌려받은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이다.

“아버지”

연희의 목소리가 들리자 곧 음악이 멈추었다.

“연희 왔냐?”

반갑게 맞아주는 춘광을 보면서 연희는 근심어린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가 보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도순의 성격 상 조용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란 걸 춘광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춘광은 걱정하지 말란 듯 웃어보였다.

“오늘은 늦게 들어올 게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이리와서 앉아 보거라.”

도순은 그렇다 치고 감시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용진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연희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조용히 문을 닫고 춘광에게 다가가 앉은 연희는 바닥에 널부러진 테잎들을 정리했다. 그동안 춘광은 플레이어를 이용해 테잎을 되감았다. 잠시후 그가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바이올린 연주곡이 시작되었다.

“잘 들어 보거라.”

오래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연희는 처음 듣는 곡이었다. 어릴 적에 늘상 춘광의 클라리넷 연주를 듣고 자랐지만 바이올린 연주곡은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춘광이 원래는 바이올린을 연주 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집안에 바이올린이 있었기에 연희는 춘광에게 바이올린을 연주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으나 춘광은 다 잊어 먹었다며 얼렁뚱땅 넘어가고는 했었다. 연희는 춘광이 옛 추억을 떠올리며 자랑을 하려는 모양이다 생각했다.

힘 있게 시작된 연주는 음울하면서도 비장했다. 그것은 마치 죽음을 앞둔 이의 고백 같았다. 연희는 며칠 전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이 떠올랐다. 거무튀튀해진 얼굴과 앙상하게 말라버린 영배의 몰골이었다. 연희는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비극의 서막을 알리 듯 베이스 라인에서 장중하게 이어지던 연주는 어느 순간 빠른 템포로 전환하며 격렬한 변주를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 같았다. 연희의 머릿속에서 영배는 앙상한 팔을 휘저으며 살려달라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 처절한 모습에 연희는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이렇게 아픈 건 정말 싫어…’

연희의 가슴 속에서 깨져나온 무언가가 불쾌한 꿈틀거림을 시작했다. 그 꿈틀거림은 화려하게 진행되는 연주에 맞추어 점점 더 움직임을 키워갔다. 어둠속에서 불꽃을 일으킬 듯 격렬하던 연주가 마침내 불꽃으로 화 해 빛을 내뿜었다. 연희의 머릿속에서 아우성 치던 영배에게도 따뜻한 빛이 내리 쬐었다. 영배는 움직임을 멈추었고 빛은 생기를 잃어버린 영배의 육신을 빠르게 재생시켜 갔다. 동시에 연희의 가슴속에서 꿈틀대는 그것은 사방으로 뿌리가 뻗어나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꼼짝도 할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힌 연희의 머릿속에서 영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처음 본 그날처럼 건강한 모습의 영배였다. 따뜻하고 평온하게 진행되던 연주는 천천히 빛을 잃어가며 장엄하고 또 숙연하게 흘러갔다. 연희의 가슴속을 뒤집어 놓으며 온몸으로 뿌리를 내린 무언가는 한순간에 폭사되어 빛으로 산화되었다. 온몸의 뜨거움을 느낀 연희는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 고통을 달래려는 듯 영배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처럼.

십분이 조금 넘는 연주가 끝났을 때 연희는 온몸을 옭아매었던 끈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연희의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연희는 티를 내지 않으려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귀가 예민한 춘광이 훌쩍이는 연희의 소리를 듣지 못 할 리 없었다.

“우리 예쁜 딸이 감동을 한 모양이구나.”

춘광은 알 지 못했다. 연희가 이 곡을 듣는 동안 얼마나 큰 심적 고통을 겪었는지. 그는 음악이 가진 힘이 대단하다고 세삼스레 생각할 뿐이었다. 음악적 재능을 갖지도 못 한,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 평범한 열 살 아이의 감정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으니 말이다.

연희는 얼른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제목이 뭐에요?”

그렇게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닌 춘광이 막힘없이 말했다.

“바흐의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샤콘느 란다.”

음악적 지식이 없는 연희는 이 곡이 얼마나 대단하고 연주하기 까다로운 곡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바이올린 연주실력이 어느 경지에 올라야 이런 곡을 연주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춘광이 젊은시절 바이올린에 푹 빠져 살았을 거란 생각만 막연하게 할 뿐이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잘 하실 줄 몰랐어요.”

춘광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난 이렇게 어려운 곡을 연주할 실력이 없어. 그래서 그만둔거야.”

“그럼?…”

“네 엄마가 연주한 거란다. 기억하지 못해도 넌 그때 뱃속에서 분명히 들었을거야.”

생각지도 못 한 대답에 연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연희는 친엄마와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 상희가 생을 마감했을 때 연희는 고작 네살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라오며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고 삶에 대한 열정이 넘쳤으며, 병을 앓아 시력을 잃었음에도 겨울꽃을 피워내는 마른 대지처럼 꿋꿋이 시련을 이겨 낸 여자. ‘내가 이렇게 예쁜 아이를 세상에 선물했다’며 연희의 탄생을 자랑스러워 하던 여자. 그런 연희가 외롭지 않게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민철을 선물한 여자. 그리고 아버지가 누구보다 사랑했던 여자.

연희는 춘광이 왜 그렇게 카세트 테잎을 지키려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자 또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연희는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한때는 춘광의 물건들로 가득 차 있던 방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도순은 춘광의 모든것을 바꿔 놓으려 지난날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처리해 버렸다. 마치 문화혁명을 일으키듯 말이다. 그리고 새로운 것들을 채워놓았지만 그곳에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고급스런 엔틱 화장대와 서랍장, 60인치 벽걸이 TV와 샹들리에 조명, 침구와 작은 소품들까지, 모두 도순을 위한 것들 뿐이었다. 이제는 도순의 방이 되어버린 이 공간에서 춘광은 한구석의 벽 모서리가 제일 편하다는 듯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춘광은 소중한 추억을 지켜내고 있는 것이었다. 연희의 기억을 통해서.

연희는 도순으로부터 엄마의 사진을 지켜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이제 더는 엄마의 얼굴을 기억해 낼 방법이 없었다. 부질없는 짓이란 걸 알지만 연희는 엄마가 살아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적어도 이렇게 야위어 버린 춘광의 모습을 보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연희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죽음이라는 것이 도순보다 훨씬 더 원망스러웠다. 죽어가는 고통도, 죽음을 지켜보는 고통도, 죽음 뒤에 남겨지는 고통도, 너무 싫어. 연희는 결국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연희가 흐느끼며 울어대자 춘광이 놀라 얼른 두손을 뻗어 연희의 얼굴을 더듬었다.

“왜 그래? 누가 우리 딸을 이렇게 울리는 거야?”

연희는 뜨겁게 눈물을 쏟아내며 물었다.

“죽음이란 게 뭐에요, 아버지?”

춘광 역시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글쎄다. 죽음이 무엇이라고 딱 잘라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오직 신 만이 알고 있겠지.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네 엄마가 보고 싶은거냐? 아님 혹시라도 이 애비가 죽을까봐 그러는 거냐?”

춘광의 두 손에 잡힌 두 볼이 위 아래로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라. 세상에서 제일 이쁜 우리 새끼들을 두고 내가 어디를 가겠느냐.”

춘광의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된 연희였지만 여전히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춘광은 조용히 연희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서 연희의 울음소리는 더욱 더 커져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우리 딸이 기운이 없는고? 혹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렇게 한참을 울던 연희가 힘겹게 입을 떼었다.

“죽지 않을거라면서요. 괜찮다고 했잖아요.”

춘광은 연희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몰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버지, 영배가 죽었대요.”

춘광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그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그의 품에서 떨어진 연희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네. 오늘 선생님이 말해 줬어요.”

춘광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적잖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잠시 고민을 하던 그가 말했다.

“전화기 좀 주거라.”

연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맡에 놓인 그의 핸드폰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그는 폴더를 열고서 손가락을 더듬어 숫자 패드 9번을 길게 눌렀다. 도순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한참동안 울린 신호음에도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폴더를 닫았다가 다시 열고서 똑같은 번호를 눌렀다. 그의 마음은 거대한 돌덩이에 짓눌린 듯 갑갑했지만 도순과의 통화는 좀처럼 연결되지 않았다.



향불은 하얀 연기를 피워 올리며 타들어 갔고, 촛불은 은은한 빛을 발하며 주위를 밝혔다. 황동색 향로와 연꽃 모양의 촛대는 소반(小盤) 위에 올려져 있었고, 소반은 비스듬하게 놓인 채 구석 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그 주위로 옷가지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방 한 옆에 깔린 솜이불 위에서 전라의 남녀가 뒤엉켜 있었다. 가구 하나 창문 하나 없는 골방에는 거친 숨소리와 교성(嬌聲)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거기에 시끄러운 핸드폰 소리가 더해졌다.

띨릴리리 띨릴리리.

사방에 그려진 사천왕(四天王)의 벽화가 지켜보는 가운데에 한 몸으로 얽힌 남녀는 핸드폰 소리를 무시한 채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데 집중했다. 부끄럼도 모른 채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남녀는 서로를 너무 잘 아는 듯 호흡을 맞춰가며 점점 더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적당히 살이 오른 중년 여자의 풍만한 가슴을 움켜쥐고서 거칠게 애무를 하는 이는 영길이었다. 그런 그를 밀쳐 눕히고 배 위로 올라타 궁둥이를 흔들어 대는 여인은 도순이었다.

띨릴리리 띨릴리리.

몇 번 울리다 끊어질 줄 알았던 전화가 잠시 후 또 다시 울어대기 시작하자 영길이 말했다.

“전화 받아야 되는 거 아니야?”

접신을 한 듯 한창 흥이 오른 도순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녀는 방해하지 말라는 듯 더 크게 교성을 내지르며 영길의 낭심을 옥죄었다. 그러자 영길은 눈알을 희번득거리며 하던 일에 집중했다. 도순은 몇일이나 배를 곯은 살쾡이가 메추리를 잡아먹 듯 굶주린 욕정을 채우고 있었다.

띨릴리리 띨릴리리.

세 번째 전화가 오자 마침내 부정(不正)한 남녀의 낮거리가 멈추었다. 도순은 흥이 깨진 듯 인상을 찌푸리며 영길의 배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널부러진 옷가지를 들춰 핸드폰을 찾았다. 영길은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도순의 허리를 잡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 그의 손길을 뿌리친 도순이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춘광이었다. 도순은 숨을 돌리며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무슨 일이에요?”

왜 그리 전화를 안받냐는 춘광의 물음에 그녀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였다.

“기도 중이었어요.”

그 순간에도 영길의 손길은 집요하게 도순의 가슴과 음부로 파고들었다. 요부(妖婦)의 혼이라도 깃든 것인지 그녀는 영길의 손 위에 한 손을 포개 올리며 더욱 거친 손길을 요구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춘광의 말을 듣던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그게 정말이에요?”

싸늘한 투로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요사스러웠던 그녀의 기운은 춘광을 대할 때처럼 험살맞게 변해버렸다. 그녀는 거칠게 욕지기를 해대었다.

“무슨 일인데?”

궁금해 하는 영길을 보며 도순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서 쏘아 붙였다.

“그러게 내가 하지 말자고 했지?”

“대체 뭔 일인데?”

도순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 애새끼가 뒤져버렸다잖아.”

대번에 알아들은 영길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브래지어를 찾아 걸친 도순은 팬티를 들고 일어나 입고서는 전등을 밝혔다. 그녀가 겉옷을 주워 입자 영길도 제 옷을 찾아 입기 시작했다. 자줏빛 개량한복 저고리를 걸친 도순은 한숨을 쉬며 푸념을 했다.

“이런 젠장. 괜히 돈 몇 푼 챙기려고… 이번에는 정말 하는 게 아니었어. 딱 뒤지게 생겼더라니까. 잡것들이 아주 생난리를 피우겠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탄탄한 몸을 드러낸 영길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괜찮아. 오히려 잘 됐어.”

영길은 눈치가 빠르고 임기응변이 능한 사람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도 당황하는 법이 없었고 빠른 상황판단 능력과 비상한 잔머리로 어렵지 않게 일처리를 하곤 했다. 그런 능력에 능글맞은 성격이 더해져 남을 속이는 데에는 탁월한 재주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를 잘 아는 도순은 내심 기대를 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영길은 음흉한 눈으로 도순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약을 두 배로 늘려야겠어.”


토요일 연재
이전 10화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