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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hill May 14. 2024

바다의 딸

초단편 판타지 소설

머나먼 시간, 머나먼 바다와 해변에서....


태양이 뜨기 직전의 새벽이었다. 이 시간이면 열리는 자연의 순환고리가 여김 없이 다시 시작되었다. 검은 밤의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하늘은 다시 푸른색을 서서히 회복해 갔다. 하지만 태양의 밝고 뜨거운 얼굴 없이, 바다와 해변, 그리고 세상에 내린 푸른색은 아직 짙고 어두웠다. 짙은 푸른색의 하늘에는 밤에면 보이지 않던 구름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달은 태양처럼 빛을 냈지만 그것을 온 세상에 내리 뿜는 대신, 오직 자신 스스로만 그것을 머금으며 어두운 하늘 위에서 홀로 빛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곧 있으면 달의 시간은 일시적으로 끝날 터였다.


짙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바다는 마치 하늘을 비추는 거울처럼, 하늘과 똑같은 색깔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고 하늘의 푸른빛이 점점 밝아지고 뚜렷해지면서, 바다는 하늘보다는 탁하고 어두운 색깔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런 바닷물은 규칙적으로 파도를 통해 해안을 쓰다듬었으며, 파도는 하얀 거품을 만들어내 해안의 모래를 적셨다. 아직 태양이 뜨기 전이라 모래는 금빛이 아닌 회색과 노란색이 섞인 탁한 색깔을 띠었다.


밤의 끝과 아침의 시작 사이에 맞물린 짧지만 신비롭고 오묘한 새벽. 새벽은 애초에 마법과 가능성을 내포한 시간이었지만 이번 새벽은 달랐다.


육지로 파도와 거품을 계속 전하는 바다는, 이번에는 또 다른 선물을 가지고 온 것이다.


바다는 계속 파도를 올려 보냈다. 파도는 해변의 모래를 계속 적시고 다듬었다. 얼마 후 해안가 모래의 작은 일부는 더 이상 까칠하거나 쉽게 부서지지 않고, 물을 머금어 단단하고 촉촉한, 생기 있는 모래가 되었다. 바다는 계속 물을 주고 파도로 그것을 다듬었다. 모래는 점점 갈라지고 분화되어 다양한 부분들로 나뉘게 되었다. 크고 작은 부분들까지 모래 위에 새겨지자, 그것은 하나의 인간의 형상이 되었다.


바다는 모래로 빚은 몸 위에 얕은 바다에 있던 해초와 조개들을 올려, 기다란 초록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귀걸이를 만들어 주었다. 파란색과 하얀색을 계속 몰아쳐, 그다음에는 파도와 거품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혔다.


마지막으로 하늘에서 사라지기 직전의 달은 바다와 해안의 경계, 인간의 형상 위에 마지막 달빛을 내리쬐었다.


바다의 순수한 물과 새벽의 신비로움이 만나, 그리고 달과 모래와 조개와 해초까지 자연물이 한데 모여, 바다는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켰다.


달빛을 받은 해안의 형상은 인간의 모습을 띄었다. 깨끗한 피부에 긴 머리카락, 파란색과 하얀색이 섞인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바다의 딸이었다.


파도의 물결이 다시 한번 그녀의 살결에 닿자, 바다의 여인은 첫 번째 숨을 내뱉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켜 눈을 뜬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태양이 뜨기 직전의 해안가에는 뚜렷한 파란색이 가득했으며, 축축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런 광경을 훑어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동시에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다리로 선 다음, 두 손으로 드레스를 들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뒤를 돌아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 그리고 바다와 땅이 만나는 부분의 하얀 거품을 마지막으로 바라보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는 육지 안쪽에 펼쳐진 숲으로, 미지와 비밀이 도사리는 숲으로 향했다. 태양이 뜨기 직전의 숲은 짙은 녹색을 머금고 있었다. 곧 여인은 숲 안으로 사라졌다.


얼마 뒤 머나먼 지평선에서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뜨거운 붉은빛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달구는 태양 아래, 해안가에는 여전히 파도와 거품만이 가득했다. 바다의 여인이 모래 위에 남긴 발자국은 파도에 휩쓸려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인간이 사라진 후 영겁의 시간이 흐른 미래, 바다는 다시 인간을 창조해 육지 위로 올려 보냈다. 시간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모든 생명은 물에서 탄생했으며 물로 돌아간다. 이는 자연의 이치이며, 다른 이치들과 마찬가지로 순환되고 계속해서 반복된다." - 이름 없는 머나먼 옛날의 한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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