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xhill May 23. 2024

가을비 그리고 하얀 드레스

Alternate 


“풀어 줘.”




그녀의 말 한마디에 정신이 다시 든다. 마치 작은 꿈에서 깨어난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자친구 제나가 등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샤워실에서 물을 틀고 다시 내 앞으로 와 있었다. 내가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던 것인가. 샤워기의 물이 쏴. 하고 쏟아지는 소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소리는 바깥에 세차게 쏟아지는 가을의 차가운 빗소리와 섞여서 귀로 들어온 만큼, 내가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제나의 요구를 들은 다음 말없이 그녀의 등으로 손을 가져간다. 조각 같은 그녀의 상반신에는 하얀색 드레스가 입혀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등 정중앙에 묶인 드레스의 매듭을 풀어 준다.




소리 없이 끈이 풀린다. 나비 모양의 리본이 두 개의 끈으로 분리되자 그녀의 등을 가로지르며 연결되어 있던 드레스의 매듭이 서로 떨어져 흔들린다. 뒤이어 제나는 자신의 어깨에 걸쳐져 있는 끈을 내리고 드레스를 벗는다. 이렇게 드레스를 풀어 주는 것도 얼마나 오래 해온 지 모르겠다. 제나를 만나고 밤을 보내는 날이면 계속되는 사이클이다. 내가 끈을 풀어주자 제나는 짧은 대답으로 보답한다. "고마워." 이 인사와 함께 제나는 새하얀 불빛이 새나오는 샤워실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문을 닫으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지만, 그녀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지 않다. 고맙다는 짧은 말에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묻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오고 하늘이 깜깜해서 내 기분이 영향을 받은 것일까. 허나 생각해 보면 나와 제나의 관계는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이런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런 모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얼마나 오래 지속되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몇 주에서 몇 달 전의 과거, 그리고 그곳에 담긴 내 기억들을 머릿속에서 찾으려고 노력할 때면 먹구름이 가득 찬 검은 하늘처럼 먹먹하고 황량하다.




제나와 함께 집에 들어온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나는 아직 겉옷을 벗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나는 자켓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았다. 그런 다음,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창문 밖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지금 잠옷이나 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침대에 누워 제나가 씻고 나오기를 기다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침대 옆에 천천히 앉아 바깥을 계속 구경하기로 한다. 사실 여기서 '구경'이라는 표현이 맞는 건지는 모르겠다. 세차게 내리는 빗방울로 창문은 얼룩졌고, 그 빗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창문 가장자리에는 유리를 강타하고 흐트러진 물방울들의 흔적이 핏자국처럼 남아 있다. 이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강 너머 건물들과 고가대로의 차량들이 뿜어내는 불빛들이 흐릿하게 얽히고 섞여 만들어낸, 형상과 희미한 색깔들밖에 남지 않은 초현실주의적 예술 작품 같다. 마치 최근 몇 주의 내 기억과도 같다. 무엇이 건물이고 무엇이 차량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가 강 쪽인지는 대충 알 수 있지만 그것은 전부 수년동안 내가 이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 처음 온 이로 하여금 창밖을 바라보게 한다면 뭐가 무엇인지 하나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이 이상한 그림과도 같은 광경을 바라보는 것을 구경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뿌옇고 이상한 창밖 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눈이 아프고 어지러움이 찾아온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방 안으로 향하게 한다. 불을 킬 생각은 없다. 창밖에서 스며 들어오는 뿌옇고 희미한 불빛은 방 안을 적당히 둘러볼 수 있게 하는 데는 충분하다. 침대에서부터 탁자, 텔레비전과 옷장, 서랍까지. 전부 친숙하고 매일 사용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내 기억처럼, 제나와 나의 관계처럼, 어느 순간부터인지 축축하고 우울한 필터가 끼워진 듯 낯선 분위기가 감돈다. 이것도 비가 그치면 달라질까.




짙은 초록빛이 도는 방안을 계속 훑어보던 나는 샤워실 문 앞에 떨어진 드레스를 발견한다. 제나가 드레스를 벗은 다음 바닥에 떨어뜨리고 샤워실에 들어간 것 같았다. 바닥에 놓인 드레스를 쳐다본다. 그것이 외롭고 차갑게 느껴진다. 그 하얀색 드레스는 내가 제나에게 선물한 첫 물건들 중 하나였다. 드레스를 보니 안개 낀 바다와 같던 나의 내면에서 몇몇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제나를 위한 선물을 찾던 도중 눈에 들어온, 레이스가 달린 새하얀 드레스의 모습. 그리고 선물을 받고 나를 향해 환한 미소와 눈웃음을 짓던 제나의 얼굴 등이 기억난다. 그때는 나나 제나나 지금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과거가 오랜만에 기억나니 약한 웃음이 나온다. 코로 숨을 내쉬는 작지만 날카로운 소리가 짧게 난다. 기억 두 가지가 떠오르니 그 뒤를 이어 관련된 기억들이 줄로 엮어 오듯이 내면의 바다 위로 떠오른다. 제나와 함께 꽃이 환하게 핀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것. 그리고 그 언덕에서 밤까지 기다려 함께 은하수를 바라본 것. 제나와 함께 요리를 한 것. 수많은 기억들이 떠오른다. 기억에 취해 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바닥에 떨어진 드레스를 한번 더 바라본다. 그러자 과거의 환상들이 후, 불듯이 서서히 사라져 버린다. 드레스가 아닌 다른 옷감이었다면 뭔가 달랐을까.




제나와 가까워진 후 그녀의 등을 쓰다듬을 때. 첫날밤 내가 사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던 천사 같은 제나의 등 뒤로 끈을 풀었을 때. 과거에는 흥분과 열정이 가득했다. 심장 박동 하나하나마다 사랑과 욕망이 끌어 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같지 않다. 내 마음, 그리고 나와 제나를 연결하는 길은 메마른 사막과도 같다. 지루하고, 얼음처럼 차갑고, 통증도 없이 무감각하다. 예전에는 매일 밤마다 제나와의 잠자리에서 그녀의 등으로 손을 가져가 끈을 풀었다. 하지만 요즘 매일 밤마다는 샤워하기 전 그녀가 원할 때마다 매듭을 풀어줄 뿐이었다. 심지어 어쩔 때는 귀찮고 짜증이 나는 것 같다. 아니, 짜증까지는 아닌 것 같다. 이 관계에서 짜증 같은 감정은 느껴 본 적이 없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눈마저 피로해지자 나는 내 신경과 주의를 귀로 옮겨 간다. 세찬 가을비 소리를 조용히 듣다가 나는 제나가 있는 샤워실로 시선을 돌린다. 문 아래로 보이는 샤워실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다. 제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귀를 자세히 기울여서 샤워기가 아직 틀어져 있는지 알아내려 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다. 샤워기가 틀어져 있다고 해도 빗소리와 함께 섞여서 둘을 구분해 낼 수는 없다. 나는 여전히 제나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이 방안에 존재한다. 이제는 창밖을 바라보지도, 방 안을 둘러보지도, 기억의 늪에 빠져 과거를 톺아보지도 않는다. 잠에 빠진 것도 아니다. 아무 생각이나 행동 없이 앉아만 있는, 존재만 하는 것이다.




정신을 놓고 있던 중 내 귀로 이상한 소리 하나가 스며들었다. 누군가의 울음과도 같은 소리였다. 소리를 듣자 나는 바로 샤워실로 고개를 돌렸다. 제나는 벌써 한 20분은 샤워실에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제나가 그 울음소리의 주인인가? 샤워실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확인해봐야 하나? 허나 그런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을 뿐, 내 팔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축 늘어져 있었다. 제나는 샤워를 하는 도중 누군가가 욕실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다. 만약 제나가 울고 있는 것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녀 홀로 감정을 물과 함께 흘러 보내도록 놔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제나에게나 나 자신에게나 말이다. 이 생각을 끝내자 내가 나도 모르게 울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손가락을 들어 눈 아래로 대 보자, 촉촉한 기운이 약간 느껴졌다. 허나 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볼을 만져 보자 물방울이 지나간 흔적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다. 울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호기심이나 힘이 없었다.




울음소리에서부터 마음을 돌리면서 나는 창밖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비는 그칠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보고서 마치 하늘이, 세상이 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의 이런 상황을 보고 눈물을 흘려주는 것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니 눈가가 다시 촉촉해지고 마음이 멍해짐을 느꼈다. 세차게 내리는 가을비는 어떻게 보면 하늘이 흘리는 눈물이 아닌가 생각했다. 내 몸은 세차게 내리는 빗물에 젖지 않았고 깨끗했지만, 마음은 젖다 못해 물속으로 완전히 잠겨 버리는 것 같았다. 피로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침대 옆에 계속 기대고 있던 몸이 불편해 왔다. 나는 남은 힘을 다해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그리고 잠시 동안 텅 빈 백지와도 같은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얼마 후 샤워실에서 불이 꺼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제나가 나온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지금 잠에 빠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조금 돌려 제나가 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하얀 가운을 두르고 있는 그녀는 샤워를 막 끝마친 것 같았다. 여전히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그녀는 침대 앞쪽의 서랍으로 다가가 가운을 벗었다.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고 서랍을 뒤지던 그녀는 그 안에서 분홍색의 드레스를 꺼내 들었다. 내가 처음 보는 드레스였다. 내가 사준 적이 없는, 제나와 생활하며 한 번도 보지 못한 옷이었다. 수면용이나 생활용인 것 같은 드레스에는 아담하고 포근해 보였다. 팔이 나오는 부분에는 프릴과 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제나는 드레스 안으로 천천히 몸을 집어넣었다. 샤워 전에 끈을 풀어 달라고 물어볼 뿐 아니라, 제나는 샤워 이후 옷의 매듭이나 단추를 채워 달라고 몸 또는 등을 내밀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새로운 드레스를 입은 제나는 혼자서 드레스를 입고 등 뒤로 끈을 묶었다. 내가 있는 뒤쪽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끈을 묶는 그녀의 손은 우아하면서도 능숙했다.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넘긴 제나는 내 옆자리로 와 천장을 바라보며 누웠다. 그녀는 이불을 가슴 끝까지 들어 올려 얼굴만 내놓은 상태가 되었다. "잘 자." 제나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잠을 자는 척을 하며 대답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어 대답을 했다. "너도 잘 자." 제나는 내 말에 다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방안에는 다시 고요함이 감돌았다. 그 상태는 계속되었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하려 노력해 보았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생각을 할 힘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았다. 오늘 이렇게 내린 가을비가 끝나면 곧 겨울이 찾아온다. 하늘에서 내린 눈물은 가을의 풍경을 녹이고 씻어내며 겨울의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가을비가 지나가고 남긴 차가움은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가움은 더 강해지고 추위로 변한다. 그렇게 지금보다 더 차갑고 추운 겨울울이 도착한다. 갑자기 겨울 생각을 하니 몸이 추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이불을 꽉 쥐고 몸에 가깝게 끌어들였다. 하지만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온다. 항상 그래 왔고 그래 올 것이다. 겨울을 생각하지 말고 봄을 생각해야만 했다. 따뜻한 봄, 오늘 짧게 맛본 과거의 기억들과도 같은 봄을 말이다.......





나는 이런 생각과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얀색 드레스는 여전히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