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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hill Jun 18. 2024

shower

xhill's another short story

야경의 불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낡은 아파트에는 적막한 어둠이 감돌았다. 수십년의 시간을 지나온 아파트와 그를 품고 있는 도시는 한여름의 더운 밤으로 깊숙이 발을 내디뎠다. 낮에 세상을 지배하던 태양은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 잠에 들었으며 그 눈부신 빛과 열기는 짙푸른 밤의 시원한 바람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아파트에서는 풀벌레와 곤충들의 울음소리가 음악처럼 작지만 꾸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으며, 귀를 기울이면 저 멀리서 자동차와 사람들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파트 바깥 번화가와 도시의 중심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아파트에서는 도시 다른 부분의 활기나 사람들의 붐빔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파트의 수많은 문과 창문들은 밤이 되면 더욱 심해지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가중시켰다. 벽면에 규칙적이고 무수하게 박힌 그것들은 마치 묘지의 비석과도 같았다. 그 수많은 창문과 문들은 각자 하나의 집으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문 안쪽의 집들은 버려져서 텅 비어 있거나 혹은 누군가가 아직 살고 있었다. 아직은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각자의 문들은 그 너머에 하나의 세계를 감추고 있었다. 그렇게 겉에서는 구별이 불가능한 수많은 객실 중 한 곳. 정확한 위치나 객실 번호는 중요하지 않은 이곳은 다른 여느 객실과 마찬가지로 어둠 그리고 고요함에 푹 잠겨 있었다.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이 아파트의 다른 객실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곳이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둠 안쪽 어딘가에, 객실 내부 어딘가에는 다른 객실에는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느덧 먼지가 낀 창문으로 달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어 집 내부를 푸르게 물들였다. 검은색만이 차지하고 있던 거실에는 짙은 푸른색과 달빛의 하얀색이 칠해졌지만 검은색의 지배를 뒤집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다른 색깔이 차지하는 자리는 검은색에 비하면 티끌만한 수준이었다. 집 안에는 여러 개의 방들이 있었다. 그들의 크기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방들로 연결되는 문들의 크기는 다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집의 가장 안쪽 구석진 곳에 위치한 방의 문 아래에서 빛이 잠시 동안 스며져 나왔다. 채 1초도 되지 않는 순간, 마치 번개가 치듯이 반짝인 빛은 곧바로 자취를 감취었다. 다른 소리는 나지 않았으며, 잠깐 동안 반짝인 빛은 문틈 사이로 존재감을 드러냈을 뿐 검은색에 도전하거나 자신이 닿는 거리를 넓히려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작은 문의 낡은 손잡이가 돌아가더니 문이 열렸다. 




열린 문을 통해 사람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그의 정체는 한 여인이었다. 나이가 결코 많아 보이지 않는 그녀는 여름에 어울리지 않게 기다란 코트를 입고 있었으며, 마치 누군가에게 자신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곳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무표정만이 피어올라 있었다. 그 외 다른 것들을 읽어낼 수는 없는 얼굴이었다. 여인이 신고 있는 작은 구두의 아래쪽에는 액체가 묻어 있었는지, 그녀가 걸을 때면 찐득한 소리를 희미하게 뿜어냈다. 하지만 바닥에 귀를 대고 있지 않는 이상 들리거나 알아차릴 정도의 소리는 아니었다. 여인은 조용히 문을 닫은 다음 집 안쪽의 다른 어딘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빛이 없는 어둠 속을 걸어가는 그녀는 마치 이곳이 익숙한 듯 헤매지 않고 걸음을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 와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큰 문 앞에 도착한 그녀는 손잡이를 돌렸다. 손잡이는 문을 열 정도의 수준까지 돌아갔지만, 여인은 손잡이를 계속해서 한 방향으로 돌리고 또 돌렸다. 손잡이는 여인의 손을 따라서 계속해서 돌아갔다. 여인은 손잡이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볼 때까지 계속 움직였다. 마침내 둥근 손잡이 아래에서 작은 반짝이는 점 두 개가 나타났다. 여인은 그제서야 돌리는 것을 멈추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다시 어둠의 공간을 마주한 그녀는 이번에는 손을 벽으로 가져가 스위치를 눌렀다. 불이 켜지면서 공간이 환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이 다음으로 도착한 이곳은 화장실이었다. 불을 켜자마자 작은 하얀색 대리석으로 만든 공간이 빠르게 형성되었다. 낡은 아파트의 인상과는 달리 화장실은 매우 넓고 깨끗했다. 바닥에는 물기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얼룩이나 먼지도 사실상 없는 새것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같은 아파트와 같은 집에 위치한 화장실이 맞는지 의문이 들만한 곳이었다. 문가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것은 변기와 세면대였으며, 화장실의 깊숙한 안쪽으로는 넓은 샤워실이 위치해 있었다. 여인은 화장실 안으로 걸음을 천천히 내디뎌 들어온 다음, 자신의 뒤로 문을 닫아 잠갔다. 여인이 들어온 화장실의 지나친 깨끗함에서는 비정상적이고 기괴함이 느껴졌다. 이곳은 화장실보다 실험실에 더 가까운 기운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여인은 그런 분위기를 느끼지 않고, 혹은 느끼고 있더라도 그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화장실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면서 여인은 천천히 구두부터 시작해 위로, 그리고 안쪽으로 자신이 입고 걸치고 있던 옷들을 하나씩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여인의 몸에서 옷가지가 하나씩 떨어졌고, 화장실 안쪽 샤워실 앞에 도착하자 그녀의 뒤로는 떨어진 옷들이 하나의 기다란 줄을 이루고 있었다. 여인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여럿 나 있었다. 그중에는 아직 피가 완전히 마르지 않은 듯한 촉촉한 상처들도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움직임과 행동거지에서는 거대한 무게감 혹은 피곤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여인이 가까스로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서야 눈에 보일 정도로 드러났다. 여인은 샤워실 안으로 들어가 유리로 된 문을 닫았다. 문을 하나씩 열고 닫으면서 그녀는 투명한 작은 공간에 도착했다. 여인은 고개를 들면 보이는 위쪽의 샤워기를 켰다. 샤워기에서는 곧 물이 뿜어져 나와 여인의 얼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물은 여인의 얼굴과 검은 머리카락부터 시작해 그녀의 몸을 적시면서 타고 흘렀다. 물의 흐름과 차가움을 느끼면서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서 있던 여인은 잠시 후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유리로 된 샤워실 안에서 그녀는 물을 맞으면서 몸에서 힘을 풀었다.




물은 생각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도 깨끗했다. 샤워기에서 시작되어 그녀의 몸에 형성된 작은 폭포와 강줄기는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누비면서 묻어 있던 것들을 쓸어 내려보냈다. 유리벽에 몸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은 여인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배수구가 있었다. 여인이 흘린 피와 땀, 그녀의 몸에 들러붙은 아파트의 먼지는 물과 함께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여인은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얀 화장실 안에서 유일하게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는 것은 물줄기뿐이었다.




샤워기의 물은 여인의 몸을 깨끗하게 해 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인의 몸에 나 있던 상처들은 하나씩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물줄기가 계속해서 피부 위를 흘러가면서 물과 피부의 접촉 시간이 늘어났고, 어느새 여인의 몸에서는 상처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몇몇 부분에서만 아주 희미한 흉터가 남아 있을 뿐, 배수구로 흘러가는 물에 섞여 있던 붉은빛도 서서히 사라졌다.




신비로운 물로 몸을 적시고 씻는 와중에도, 여인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 깨끗한 데다 마법의 힘까지 가진 물로 샤워를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씻겨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방 안쪽의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부터 그것은 그녀에게 묻어 있었다. 몸을 씻기 위해 화장실에서 샤워기를 튼 순간에도,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몸이 깨끗해지고 상처가 아무는 동안에도 그것은 여전히 지워지거나 희미해지지 않았다. 하나의 얼룩, 하나의 더러움, 지울 수 없는 무언의 흔적이었다. 여인이 샤워실에서 몸을 씻는 동안 그것은 오히려 몸과 크기를 불려 점점 더 커지는 듯했다. 물에 젖으면서 지워지기는커녕 더욱 더 번지고 바깥으로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것은 여인의 마음에 묻어 있는 것이었다. 




죄책감이었다.




여인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하얀 벽만이 펼쳐져 있었지만 그녀는 그 너머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수많은 벽들, 수많은 세계를 넘어 위치한 하나의 방. 자신이 문을 열고 지나온 그 방 한가운데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시신이 보였다. 여인이 칼로 찔러 암살한 그 시신은 피가 이미 거의 다 빠져나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굳어버린 시신이 쏟아낸 피는 물이 되어 여인에게 돌아와 폭포처럼 쏟아지는 듯했다. 세차게 내리는 비의 한가운데로 떨어진 여인에게 물소리는 그녀의 귓가에 들리는 속삭임이었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그녀의 귀를 타고 마음과 머리로 들어가 진실을 말했다. 그녀가 마주하기 싫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독약이었다. 




샤워실 바깥, 화장실의 바닥에 버려진 여인의 코트 안쪽에 숨겨진 칼은 여전히 붉은 피가 묻어 뜨거웠다. 차가운 소나기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은 여인은 그 뜨거움을 아직도 느낄 수 있었다. 손아귀와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물은 멈추지 않고 여인 위로 쏟아졌고 마음에 묻은 것은 더욱 커져만 갔다. 검은 피가 든 잔 위로 계속 물을 쏟아붓자 물과 피가 뒤섞여 탄생한 빨간 액체는 잔을 가득 채우고 결국 바깥으로 흘러넘쳤다. 여인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몸과 불규칙한 숨을 내쉬는 가슴을 움켜쥐고는 젖은 하얀색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여인은 주저앉은 채 샤워기가 달린 벽까지 기어갔다. 샤워기는 마치 움직이는 그녀를 따라온 듯, 여전히 그녀의 몸과 얼굴 위를 겨냥한 채 물을 쏟아붓고 있었다. 여인의 눈앞에는 샤워기의 손잡이가 있었다. 손잡이의 왼쪽에는 파란색, 오른쪽에는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여인은 떨리는 손을 내밀어 손잡이를 쥐었다. 배수구로 물이 계속해서 내려갔지만 보이지 않는 물은 여인의 목 끝까지 차올라 그녀는 물에 빠져 죽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손잡이의 눈금이 서서히 오른쪽, 빨간색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인은 곧 자신의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그녀는 커다란 고통 아래에 짓눌리고 있었다. 여인은 오른쪽으로 손잡이를 돌릴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다. 여인은 손잡이를 돌린 손을 다시 움직였다. 방향은 반대쪽이었다. 이번에는 천천히 돌리지 않고, 손잡이를 확 틀어서 그녀는 확실하고 거대한 선택을 내렸다. 손잡이와 눈금은 왼쪽 파란 부분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손잡이를 돌리자마자 샤워기에서는 다른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육안으로는 구분할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솟구쳐 나와 여인을 적시던 물에 다른 무언가가 섞여 들어간 물이었다.




새로운 물은 여인의 몸을 계속해서 적셨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물은 그녀의 안쪽, 피부 아래로 스며들어 그녀의 마음과 정신으로 이동했다. 투명하면서도 형체를 뛰어넘는 물줄기는 피부나 촉각이 아닌 오직 여인의 마음으로만 느낄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물줄기가 형성되자 샤워기의 물은 그녀의 마음에서 죄책감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죄책감의 얼룩이 여인의 마음에서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여인의 마음에 이전의 얼룩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진 것은 죄책감이 만들어낸 얼룩만이 아니었다.




샤워기의 물은 어느덧 저절로 멈추었다. 남아 있던 물줄기는 배수구 아래로 내려가면서 얼마 후 다 사라졌다. 샤워실에 남은 것은 유리 벽과 바닥에 남은 작은 호수와도 같은 물방울과 물기뿐이었다. 여인은 하얀 바닥 위로 쓰러져 있었다. 천장을 응시하는 여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몸은 역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며, 표정에도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희미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이후 다시 일어나 화장실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온 푸른 물은 그녀의 죄책감과 함께 그녀의 감정과 기억, 연민과 불안과 공포를 모두 해일처럼 휩쓸어 갔다. 그녀의 영혼은 물에 뒤섞인 채 배수구 아래로 흘러가 사라졌다. 여인과 같은 상황에 놓여 같은 상황에 처해 버린 다른 이들의 감정과 영혼과 기억들과 함께 배수구 아래, 검은 세계로 흘러가 모든 것이 뒤섞이고 사라져 버렸다. 하얀 대리석 위에는 살아 있는 껍데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가까스로 뜨고 있던 여인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녀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황혼의 꿈을 꾸고 다시 깨어나면 그녀는 더 이상 암살 임무에 방해가 될 만한 내면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와 명령만을 순조롭게 따르며, 죄책감이나 연민 따위는 가지지 않는 존재가 되어 다시 수많은 방과 어둠 사이를 누비게 될 것이다. 




닫힌 화장실 문 사이로는 하얀 빛이 조금씩 스며져 나왔다. 그 하얀 빛에 묻은 공허하고 차가운 기운이 바깥으로 퍼지자 거실과 집 안을 가득 채운 어둠마저 주춤하는 듯했다.




아파트 한가운데 자리잡은 나무에서는 또 하나의 꽃이 시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죽지 않은 채 나무 위에 매달려 있었다. 이전의 아름다움이나 향기는 사라진 이후였다. 나무 아래에는 수많은 다른 꽃과 꽃잎들이 떨어져 하얀 카펫을 이루고 있었다. 




이날 밤 꽃의 묘지는 또 다른 한 송이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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