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이 꼼꼼하면 힘든 이유
공무원 시험과 업무는 다르다
나는 태생적으로 성격이 꼼꼼한 편이다. 그래서 공시생 시절에는 내가 공무원 업무에 굉장히 적합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법령을 꼼꼼히 파악하고, 빈틈없이 회계 처리를 하는, 그런 철두철미한 공무원.
적어도 공시 공부를 할 때까지는 이런 성격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하루 종일 머릿 속에 시험 관련 내용을 떠올리고 만약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불안한 마음에 책을 펴서 확인해야 잠이 드는 그런 성격. 덕분에 늘 불안해 하긴 했지만 공무원 시험에 별 어려움 없이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공무원이 되어 실무를 하다보니 실제로는 오히려 내가 가진 꼼꼼함이 방해가 될 때가 훨씬 많았다. 일반적으로 행정이나 회계 업무보다도 민원 업무를 볼 때 특히 이 꼼꼼함이 훨씬 더 치명적인 장애물로 작용했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느날 민원인이 평소에 흔히 발생하지 않는 부분의 민원을 요청한다. 일단 처음 듣는 내용이니 알아보고 연락주겠다고 해놓고 여기저기 법령과 과거 문서를 뒤진다. 관련 법령에서 연관성 있는 내용을 찾아낸다. 아쉽게도 문서대장엔 비슷한 방식으로 처리된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겨우 찾아낸 관련 법령을 파고파고 들어간다. 시행령, 시행규칙 등등 열심히 찾아보지만 '~할 수 있다.' 식의 애매한 내용만 있을 뿐 딱 떨어지는 메뉴얼이나 지침이 없다. 찾다찾다 상위 부처에서 발간한 질의응답집에서 관련 내용이 담긴 질문을 찾았는데, 이런! 어떠어떠 하다고 볼 수 있지만 결국 담당 공무원의 재량에 따른다고 되어 있지 않은가.
결국 정해진 건 없고 나 스스로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민원인과 팀과장을 설득해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내 특유의 꼼꼼함(나쁘게 말하면 불안증)이 작용해 엄청난 크기의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정답에 가까운 업무 처리 방법은 당연히 있다. 하지만 민원인과 팀과장이 원하는 건 다 제각각이기 때문에 모두를 설득시켜 일처리를 진행하려면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빈틈없는 방법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머릿 속은 그 업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찬다.
'다른 청에 한번 더 물어볼까?'
'뭐라고 말해야 민원인이 순순히 물러날까?'
'팀과장은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알아서 하라고 해놓고 나중에 뭐라 하는 건 아닐까?'
'혹시 내가 법령을 잘못 해석한 건 아닐까?'
'내가 일을 잘못 처리해서 문제가 커지면 어떡하지?'
다행히 온 힘을 다해 업무를 처리한 끝에 별 문제 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매번 이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니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구청 생활을 얼마 이어가지 못하고, 다시 시험을 쳐 비교적 민원 상대할 일이 없는 지금의 직장인 교육행정직 공무원으로 이직해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모든 일을 꼼꼼하고 완벽하게 처리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공무원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공무원 조직이 바라는 최고의 인재상은 스트레스 받아가며 '일을 꼼꼼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가 뭐라하든 개의치 않으며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일을 꼼꼼히 하려 해도 빈틈은 생길 수밖에 없고 반대로 일을 빠르게 대충대충 쳐내더라도 결국 하다보면 일은 진행되기 때문이다.
특히 의미 없는 페이퍼 업무 혹은 말도 안되는 민원인의 요구로 인해 발생하는 비합리적인 업무가 대다수인 공무원 업무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어느 누구에게도 욕먹지 않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는 직원보다는 민원인과 윗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지언정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팍팍 일처리를 진행시키는, 그런 직원이 훨씬 더 공무원 조직에 도움이 되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극단의 꼼꼼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공무원 조직에서 버티는 게 참으로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만 면직에, 휴직에 조직에 섞이지 못하고 밖으로만 계속 겉돌고만 있다.
하지만 어쩌라. 타고난 성향이 이런 것을.
그래서 이제는 그냥 받아들이려고 한다. 타고난 내 성향을 공무원 조직에 맞게 바꾸려하는 것보다는, 밖에서 내가 가진 장점을 마음껏 발휘하며 살아가는 것이, 먼 미래를 봤을 때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 될테니까 말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D
* 배경 출처: 영화 <인사이드아웃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