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에 배운 담배
최선을 위해 최악을 버리려 기다린 시간, 서른 해
여섯 살에 처음으로 담배를 배웠다. 순전히 호기심에서 비롯된 자기 학습. 삼촌이 방에서 날마다 입에 물고 뻐금거리며 희뿌연 구름을 만들던 흰 막대의 정체가 궁금했던 순수하고 순진한 꼬마아이는, 혼자서는 무서웠는지 동생을 데리고 삼촌이 없는 틈을 타 방에 들어가 서로 하나씩 흰 막대기를 꺼내 라이터 불을 지피고 뻐끔거리는 시늉을 했다. 두어 번 뻐끔거리던 와중에 거세게 방문을 열어젖힌 삼촌의 등장으로 상황은 정리됐고, 세상 물정보다 더 빨리 배운 것이 담배였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여전히 세상 물정을 몰랐다. 흡연을 일찍 배운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어쩌다 보니 '말보로 라이트'라고 적힌 친구의 담배를 내 호주머니에 넣게 되었다. 밤늦게 과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그 길에는 어둠을 힘겹게 밀쳐내는 낡은 가로등 무리와 나뿐이었다.
한 대만 피워볼까...
호기심 하나로 담배에 불을 지폈던 여섯 살의 나는 희멀건 담배구름을 폐 안으로 삼키는 법을 몰랐다. 그저 뿜어져 나오는 햐안 구름의 정체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인 나는 여섯 살 때와는 달리 흡연하는 법을 이론상 알고 있었다. 담뱃갑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살며시 입술에 담배 끝을 가져간다. 볼을 서서히 조여가며 담배속 연기를 빨아 들인다. 입 안에 머금은 연기를 조심스럽게 체내로 들이킨다. 콜록거림 대신 헛구역질이 나왔다. 내 몸은 적극적으로 담배연기를 밀어내려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담배연기는 허공에 번질 때보다 더욱 빠르게 기도를 지나 폐에 안착했다. 그 짧은 사이에 담배연기는 자신이 들러야 할 세포 하나하나에 빠짐없이 침투했다. 폐에 이르러서는 페포에 확실하게 터를 잡았다. 핏줄은 그들을 거부했지만, 거부할수록 연기는 억지로 엉켜 붙었다.
여섯 살 때엔 삼촌의 불호령으로 담뱃불을 끌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직접 담배를 길바닥에 내던지고 발로 지긋이 비벼 담뱃불을 껐다. 왼손에 쥔 담뱃갑 채로 남은 담배를 모조리 길 모퉁이에 던져버렸다. 애석하게도 이미 내 몸속을 파고든 담배연기를 던져버리기란 불가능했다. 집에 도착해 부모님에게 들킬세라 부랴부랴 화장실로 향했다.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칫솔질을 했다. 타월로 몸에 번진 담배 냄새를 박박 닦아냈다. 그 와중에도 내가 들이쉰 연기는 내 몸에 더욱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잠을 잘 수 없었다. 비로소 담배연기는 내 뇌 속까지 염탐하며 유린하기 시작했다. 매운 치약으로 양치를 하고 구역질을 참아가며 혀 구석구석을 닦아내도 담배연기의 농후한 쉰내를 없앨 수는 없었다. 그날 밤 담배가 내 오장육부와 뇌를 농락하는 동안, 이리저리 몸부림치며 뜬 눈으로 동이 트는 창문을 바라봐야 했다. 그 이후로 나는 고등학교 내내 담배를 멀리했다.
선천적으로 기관지가 안 좋다는 것을 고2 때 처음 알았다. 가끔씩 숨을 쉴 때마다 심장에 누군가가 날카로운 바늘을 찔러대는 고통이 찾아왔다. 남들보다 목감기에 면역도 매우 약했다.
"너는 절대로 담배는 안 된다이"
매우 자상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일백 가지 경고의 의미가 숨겨져 있는 듯한 말투로 어머니는 나에게 담배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다(엄마는 내가 여섯 살 때 담배를 배우고 고등학생 때 이미 전적이 있음을 몰랐다). 폐가 망가져 '패가망신'하게 될 거라는 섬뜩한 말장난을 일삼는 것도 서슴지 않으셨다. 하지만 나는 기어코 성인이 되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점퍼 호주머니에서 엄마가 담배를 발견하기를 두어 번. 그럴 때마다 엄마는 세상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남보다 더 남남처럼 나를 대하셨다.
서울로 상경한 이후로는 그 누구도 나의 흡연에 왈가왈부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흡연자의 곁에는 흡연자들이 더욱 모이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여섯 살에 알게 된 담배에게 고2 때 처음으로 나를 압도당하던 그날 이후로, 서른 중반까지 담배를 곁에 두었다. 거진 삼십 년.
담배를 피우는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담배를 끊어야 할 이유는 수 없이 많았지만, 펴야 할 압도적인 단 하나의 변명 때문에 끊지 못했다. 처음 담배를 입에 물 적부터 호기심으로 시작한 것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분리해 낼 수 있을 법했던 뿌연 연기가 몸 안에 서서히 자연스럽게 얽히고설키어 결국 내 일부가 되었다는 구차함. 최악임을 알면서도 최악의 것에 최선을 다하는 행위에 대한 최악의 명분.
서른다섯 지금. 글쓰기란, 삶을 체득하는 육체노동이란 것을 깨닫고, 프리다이빙이라는 고요하고 정직한 일상을 얻고나서부터 나는 드디어 담배를 끊어야 할 이유를 만났다. 여섯 살 첫 흡연 이후 서른 해가 지나서였다. 금연은 내가 나이기 위한 온전한 움직임의 시작이었다. 글을 쓰고 물과 함께하는 일상은 나라는 사람의 진실에 다가서는 진심이 담긴 행동이었다. 그 온전하고도 진심이 담긴 곳으로의 향유를 위해서는 그에 수반되는 육체적, 정신적 고단함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수고스러움을 위해서는 나의 기본적인 능력, 체력과 정신력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그 둘을 위해, 그리고 그 둘을 만끽하는 나를 위해서, 나는 기꺼이 내가 서른 해 동안 길 모퉁이로 던지지 못한 담배를 이제서야 겨우 내동댕이 칠 수 있었다.
최선을 위해, 최악을 버리려고, 서른 해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