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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Dec 06. 2023

야동의 성지

야동 채널 편성 PD의 삶이란...


 그곳은 방송국이라기보다는 일반 회사였다. 성인 채널 외에도 몇 개의 일반적인 케이블 채널을 더 갖고 있었는데, 외부에서 영상을 사다가, 채널에 틀었다. 워낙 험한 일을 겪고 오다 보니, 상대적으로 사람들도 착하게 느껴졌고, 늦더라도 밤을 새우는 일은 없었다.


 내게 맡겨진 성인방송 편성 PD의 가장 중요한 일은, 약속된 편성 시간에 1초의 오차 없이 야동을 트는 일이었다. 시간 계산을 잘해서 운행표를 정확하게 작성해야 했다. 1초의 오차라도 나면 화면에 블랙이나 칼라바가 나갔고, 그건 방송사고였고, 경위서를 썼다. 나도 입사 초에 54초간의 칼라바를 송출해서 경위서를 썼다.

 어쨌든 운행표를 작성하려면, 대학생 수강 신청 하듯, 일단 편성표를 짜야했는데, 그러려면 먼저 강의를 알고 있어야 하듯, 편성표를 채울 야동들을 꿰고 있어야 했다. 내용까지는 몰라도 이게 한국산인지, 일본산인지, 서양산인지, 몇 분 몇 초 길이의 야동인지를 숙지해야 했다.


 하지만 숙지해야 할 스케일이 대단했다. 알바할 때, 박스에 담겨있던 야동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야동의 성지, 야동의 대도서관이었다. 대학교 도서관의 책들처럼, 사무실 책장에 수백 편의 야동 테이프가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그걸 파악하고 일하기 쉽게 정리하느라 입사 초, 늘 퇴근이 늦긴 했지만, 야동들이 익숙해지며 칼퇴근이 가능해졌다.




 회사는 내게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게 없었다. 월요일 아침엔 방송본부 전체 회의를 했는데, 그 자리에선 각 채널의 편성 PD들에게, 시청률 반등을 위한 편성 전략을 요구했다. 하지만 나는 논외였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야동 채널은 전략이고 나발이고, 더 야한 신작들만 계속해서 때려 박으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성인 채널은 유료 가입 채널이기 때문에, 모텔 영업이나 이벤트 같은 마케팅 전략에 기댔다. 임원들마저 영업맨 출신들이어서, 깨져도 영업팀만 깨졌다. MBC 본사를 오고 가며 편성국 직원들의 고뇌를 목격했고, 그래서 입사 전, 편성 전략 책들을 떠들어보고 왔던 난, 이내 머쓱해졌다. 회의 땐 그저 코 한번 쓱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대신, 대학 시절 획득한 컴퓨터 편집 능력을, 공중파가 아닌 이곳에서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 채널에 부족했던, 야동 예고나 필러 영상(시간을 맞추기 위해, 본편들 사이에 끼워 넣는 자투리 영상)을 컴퓨터 편집으로 쏟아냈던 것이다. 그중 백미는 모자이크였다. 방통위 심의규정 준수를 위해, 한 가닥이라도 놓칠세라, 털들을 쫓으며 모자이크를 쳐댔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외주제작업체에 콘셉트 아이디어도 제시해야 했다. 그때의 아이디어로는 이딴 것들이 있다.


 1. 누디티 파라다이스 - Adult 서바이벌 동거동락!

 '한국 최초 그라비아 모델'이 되기 위해, 출연자들이 합숙하며 경쟁한다!

 우승을 위해, 15~20명의 에로 배우들이, 경치 좋은 섬 <누디티 파라다이스>에서 심사위원과 제작진에게 뜨거운 유혹을 보내는데! 더불어 멤버 간의 다툼이나, 공교롭게 맺어지는 커플 등도 여과 없이 담아낼 예정! 이 리얼리티 시리즈물의 최종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2.  나는 펫 - 애완녀 키우기!

 애완 '펫녀'가 상대남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를 달아오르게 만드는 모든 과정, 서로 간의 감정 변화 등을 세심하고도 뜨거운 리얼리티물로 담는다!


 또, 회사에선 신작 야동들이 생기면, 임원들과 성인 채널 관계자가 둘러앉아 함께 야동을 봤다. 그리고 그중 선택받은 야동을 골라 구매했다. 그걸 스크리닝이라고 했다. 또는 외국에서 직접 구매한 서양산 포르노들도 있었는데, 우리나라 방송법에 맞게, 특정 부위가 3분의 2 이상 클로즈업된 곳은 잘라내고, 털은 모자이크 처리해 신작 한 편을 뚝딱 만들어냈다. 제목은 멋대로 내가 지었다. 예를 들어, 원제 'Leg Fantasy'는 '금발의 탐스런 다리 사이로',  'Love for the first time'은 '첫사랑 삽입 면허' 따위로 바꿔 짓는, 야동 작명가였다. 그리고 신년에는 거래처에 돌릴 선물로 야동을 준비했다. 동시에 5개가 구워지는 DVD 라이터로 200개의 야동을 정성스레 구웠다. 일반 직장인의 시각에선 기이하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모두 진지한 업무였다.


스크리닝에서 간택된 신작 구매를 위해 보냈던 메일.


 스트레스가 없었다. 편성은 아무거나 틀어 재껴도, 한 주에 3방·4방을 때려도 OK였고, 편집도 내용이 튀든, 컷이 튀든 어쩌든, ‘야동에 그게 뭣이 중헌디!’ 였다. 복지마저도 훌륭했다. 구내식당 밥은 맛있었고, 퇴근 후엔 사내 헬스장에서 운동까지 했다. 회사의 지원으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디지털영상편집 야간과정에서 프리미어 같은 NLE 편집 프로그램인 '아비드(AVID)'를 배울 기회까지 주어졌다.

 '이게 정직원이지!' 싶었다. MP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월급은 적었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받았던 것보단 많았다. 그런데 또 몹쓸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면, 커서 뭐 되나...'


 난 언제까지 이렇게 털들을 가려대고, 또 언제까지 '21세기에 돈까지 내고 야동을 보는데, 털을 싹 다 가려버리면 어쩌냐!'며 항의 전화하는 할배들을 달래줘야 할까. 이센스의 '독' 가사처럼, 줄에 묶여있는 개 마냥 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 반쯤 죽어있는 느낌으로 보낸 1년 9개월째, 난 MP의 조연출인 정우 형에게 전화했다.


 "형, MP에 자리 생기면, 저한테 꼭 연락 주세요..."


 2009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결국 난 사직서를 냈다. <성공의 비밀>이라는 프로그램의 조연출로, MP 복귀라는 고생길을 선택해 버렸다. PD님들에게 인사를 했다. 종교방송 잠수 후, 거의 2년이 지났는데도, 그분들을 보니 '참지 못하고 도망쳐버린 패배자'란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얼굴이 빨개져 쭈뼛거리는 내게, 한 PD님이 말씀하셨다.


 "못 올 데 왔냐? 괜찮아."

 "예..."


 몇몇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특히 친했던 조연출 형들은 대부분 남아있었다. 변한 게 없었다. 2년 만이지만 마음만은 이곳이 더 편했다. 또 <성공의 비밀> 팀에는 동현이라는, MP에 몇 안 됐던 동갑인 조연출도 있었다. 전부터 친했던 그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를 하다가 이 팀으로 넘어온 모양이었다. 또 처음 보는 중호라는 FD도 있었다. 착했고, 잘했다. 모두 의지가 됐다. 복귀 후, 새로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멤버이자 친구들이었다.


 나는 드디어 필드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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