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등학교 시절은 다들 가난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찍이 난 어머니께 돈 타내는 방법을 깨우쳤다.
"엄마, 책 빌리게 500원만..."
어머니는 아들놈이 왜 돈을 달라는지, 무엇을 샀는지 언제나 확인하셨지만, 책에 관해선 그러시지 않았다. 없는 살림에도 언제나 돈을 쥐어주셨고, 무엇을 읽는지 묻지도 않으셨다. 그 몇백 원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마음에 신이 나서, 당시 '도서 대여점'이라고 불렸던 동네 책방을 자주 들락거렸다. 하지만 소설책만 빌렸다. 만화책을 빌려본다는 건 왠지 죄스러웠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됐다. 반에서 만화책 한 권을 모두가 돌려보고 있었다. 뭐지?
"저거 뭔데? 나도 좀 보자."
"야. 줄 서. 너도 보고 싶으면 기다려. 넌 다섯 번째야."
내 앞에 네 명이 대기라고?! 뭐길래? 의기양양한 그놈에게 허락을 받고, 학교가 끝날 때쯤에야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그 만화책. <슬램덩크>였다.
<슬램덩크>는 1992년도부터 출간됐고, 내가 처음 접한 1995년엔 벌써 23권까지 나온 상태였다. 그때부터 친구들에게 수소문해 1권부터 정주행을 마쳤고, 그 뒤로는 새 단행본이 나오기만을 눈과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처음으로 어머니 몰래 책방에서 빌린 만화책도 <슬램덩크>였다.
1996년 10월 30일. 강백호와 서태웅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날 울려버린 마지막 31권이 나왔을 때까지, 그렇게 <슬램덩크>는 내 중학교 시절을 함께했다.
이 이야기는 왜 이렇단 말인가
<슬램덩크>는 밖에서 뛰노는 것보다 집이 편했던 나를, 일요일 아침마다 깨워 일으켰다. 없는 용돈을 일주일에 몇천 원씩 몇 달 모아 스타 농구공을 샀고, 그 농구공을 들고 학교를 찾아, 강백호처럼 골밑슛 500개를 했다. 그렇다고 강백호가 될 순 없었지만, 어쨌든 날 움직이게 했다. 반의 모든 친구가 만화책을 읽으려고 줄을 섰고, 방과 후, 점심시간, 쉬는 시간까지 나가서 농구를 했다.
대체 이 이야기는 뭔데 이렇게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가. 어떻게 이렇게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는가. 어떻게 이렇게 사람들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는가. 왜 다시 봐도 이 흥분, 이 감동을 멈출 수가 없는가.
스스로 돈을 벌고 여유가 생기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슬램덩크> 오리지널 판 전권 구매였다. PD로 영상 제작을 하며 언제나 이런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고, 사수가 없던 내게 <슬램덩크>는 교과서가 됐다.
비단, 나뿐만 아닐 것이다. 현재 영상 바닥에서 메인급인 30~40대 PD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슬램덩크>의 영향을 받은 세대들이 아닐까. 일단 내 주변 모든 PD가 그랬고, PD가 아니더라도 그들 중 이 만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영상 제작을 위해, <슬램덩크>에서내가 훔쳤던방법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나를 위한 일이지만,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든다. 워낙 완벽한 작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