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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기쁨 May 08. 2023

오래된 그림이 들려준 오래전 이야기

1996년 영도 산동네 따뜻했던 공동생활을 그리다


아주 오래전 그림을 발견했다.

내가 좋아하는 연필그림이다.

2012년이니까 벌써 10년 전에 그린 것이다.

친구와 함께 우리가 일하는 선교단체의 홈페이지에 지나온 우리 간사님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사연을 받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올린 것들 중의 하나이다.


이 그림들은 나의 이야기를 테마로 그린 마지막 스토리였다.






1996년, 그때 나는 싱글이었고 부산에서 대학생들을 제자훈련하는 학교(UDTS)에서 간사로 일하고 있었다. 간사 6명과 학생 11명이 9개월 동안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신앙 훈련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우리는 당시 이 훈련학교를 위해 영도 고신대학교 바로 아래 거의 반쯤 쓰러져가는 슬레이트지붕 집을 구했다. 그때는 선교사로 훈련을 하는 것은 사서 고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허름한 산 동네 집일지라도 우리를 위한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각자가 가진 재능을 발휘해서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고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면서 즐겁게 생활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남자 간사들과 학생들은 집 안팎으로 보수할 곳들을 찾아 다음 기수로 훈련을 받을 후배들이 들어와도 불편함이 없는 집이 되도록 시간 날 때마다 고치고, 여자 간사들과 학생들은 집 안 곳곳을 예쁜 소품들과 그림으로 함께 하는 우리의 공간을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공간으로 만들어 갔다. 초라하고 냉담한 시선을 오래 견뎌낸 그  산동네 집이 우리 학생들로 인해 아름답게 변모하고 점점 좋은 사람들이 반가운 손님으로 끊이지 않는 장소가 되어갔다.





그렇게 마음과 힘을 다해 우리의 공간을 가꿔갔지만 한계는 있었나 보다.

비가 며칠 동안이나 억수 같이 쏟아지는 날이 계속되면서 점점 우리의 엉성한 지붕이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남자 간사들이 지붕 위에서 비를 쫄딱 맞아가며 나름 대비를 한다고 했는데 그만 일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지붕을 때리며 내리 꽂히는 빗소리가 요란했던 어느 날 밤,  한 방을 쓰는 여자 간사들과 취침 기도를 마치고 누우려는데... 여학생 하나가 울먹이며 방문을 두드렸다.

깜짝 놀라 얼른 문을 열었다.


"간사님, 지붕에서 비가 떨어져요..."


다급하게 여학생들의 방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야속한 빗방울이 하필이면 방 가장자리도 아니고 한가운데로 뚝뚝 떨어지고 세 명의 여학생은 이불이 젖을까 바짝 껴안고 벽에 붙어서는 불안한 눈으로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걸레로 닦기도 하고, 양동이를 받쳐 보기도 하고, 그러다 빗 줄기가 더 굵어지니 도리 없이 우리 방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지붕을 파고든 가는 빗줄기에게 잘 곳을 빼앗긴 채 쪼그리고 앉은 아이들 모습에 미안하고 속이 상했다. 왜 또 하필이면 여학생들의 방이 샜을까.. 그냥 우리 방 지붕이 뚫렸더라면 마음이 조금은 덜 아팠을 텐데…


일단 비가 새지 않은 우리 방과 다른 여학생 방에 아이들을 나누어 재우고, 남자 간사들은 밤새 지붕과 사투를 벌이며 수습을 하려 했지만 장마철 쉼 없이 내리 붓는 비를 도무지 이길 재간이 없었다.

그 밤에도, 그다음 날에도 비는 멈추지 않고 내렸고, 집 안에는 하나, 둘, 양동이들이 늘어갔다.

멀쩡하던 거실마저 결국 커다란 양동이가 차지하고 앉아버렸다. 몸도 마음도 지쳤고, 이제는 그저 하염없이 내리는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비가 스며든 천정과 벽에 얼룩이 늘어가고 집안 곳곳에 음습한 기운이 퍼져나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때, 우리 학생들이 애써 가꾼 우리의 보금자리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서글퍼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지붕의 작디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가는 빗방울이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와 같이 우리의 소박한 행복을 빼앗아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습기와 함께 마음은 불만으로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온통 우울하기만 하던 그날, 그냥 넘어가도 좋을 것 같은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와 같이 손님이 찾아왔다. 고신대학 예비역 학생이었는데, 공동생활하면서 훈련을 받는 후배들을 보러 아주 오랜만에 방문했다. 그래도 반갑게 안부를 묻고 우중충한 거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비가 뚝뚝 떨어지는 양동이가 바로 코 앞에 놓여 있는 소파에 앉았다.


아이고 비가 새는구나,
미안해요, 오랜만에 왔는데 집이 이래서...
아니에요, 별말씀을.. 허허


이런저런 인사말을 나누고 따뜻한 커피를 대접했다.




커피를 받아 든 손님은 바로 앞에서 빗방울을 똑똑 받아내는 양동이에 시선이 고정된 채로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앉은자리에서 바로 시선이 닿는 곳에 양동이가 있으니 달리 눈 둘 데가 없기도 해서 그리 보고 앉았겠지만,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별로 편치 않았다. 괜히 우리가 측은하고 누추해 보일 것 같아서였을까..

어색한 침묵 속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몇 배로 크게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미동도 없이 앉았던 손님이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무심하게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집 좋다."


뭐라고?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집이 좋다고요? 비가 새서 이렇게 난리인데요?"


빗방울 받치는 양동이를 보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이라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좋죠~ 이런 집이라도 있는 게 어디예요? 우리 때는 9개월 내내 사무실이든, 어디든 공간이 생길 때마다 옮겨 다니면서 지냈잖아요. 비가 새나 마나 우리 공간이 있으면 정말 소원이 없겠다 했다니까요."


그렇다. 이 손님은 우리 학생들이 하는 훈련학교의 1기생인데 그때는 공동생활을 할 공간이 없어서 학생들도, 간사들도 무진장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우리 선교단체 사무실 바닥에 장판을 깔고 자기도 하고, 잠시 기거하도록 허락받은 교회나 지인의 집에서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첫 기수를 시작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으면서 그래도 자기는 고생을 했지만 후배들은 이나마도 독립된 공간이 있어서 참 감사하다 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덧붙였다.


"집이 참 따뜻해요, 분위기가..."


내가 유난히 귀가 얇은 건가, 신기하게도 손님의 이 한마디에 날 선 마음이 일순간 무장해제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집 나간 감사가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지... 홍수가 나서 집이 통째로 떠내려간 것도 아니고

고작 이 작은 빗줄기 하나에 우리가 쌓아 올린 수고와 행복이 사라지다니 그럴 리가 없다.

빗줄기를 바치는 양동이가 잠시 내 시야를 막았을 뿐, 우리의 따스함이 배어있는 공간은 그대로 존재하고,

그 속에 학생들의 웃음과 기도가 살아있고,

우리가 기대하는, 비가 그치는 그날이 되어 다시 해가 돋으면

울퉁불퉁 늘어진 벽지도 제자리를 찾을 것이고

축축하게 무거워진 이불들도 빨래 줄에서 뽀송뽀송 제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고

빗방울을 받치던 양동이들도 차곡차곡 포개어 마당 한 귀퉁이 자기 자리로 돌아갈 것인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단지 지금 비가 오고 있을 뿐이다. 주께서 주신 곳에서 주님이 만나게 하신 사람들과 주를 예배하며 살게 하신 이곳이니 비가 오는 날이라고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덕분에 우리의 남은 대화도 밝아졌고 마음도 덩달아 밝아졌다.

예기치 못했던 그 손님의 방문은 마치 천사의 방문과도 같았다.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 경쾌한 양동이 앞에 둘러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었던 그날의 희미한 기억이 무채색 그림이 되어 돌아온 오늘...

오늘도 그날처럼 때 아닌 5월의 비가 종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비가 새는 일도, 거실 한 복판에 심란한 양동이를 마주하고 앉을 일도 없다.

살아오면서 그때보다 더 삶은 풍성해지고 세상은 몰라보게 발전했지만 그와 함께 내 마음은 감사와 만족으로 더 풍요로워졌는지...

근 30년 만에 다시 찾아온 그림 속 손님이 나에게 물어보는 것 같다.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내 젊은 날의 산동네 공동생활집의 추억이 창문을 타고 내리는 빗줄기같이 마음 깊이 스며든다.





#비오는날#산동네#손님#추억#감사#공동생활#그림#연필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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